고전 완독 못 해도 괜찮아요, 덮는 법과 다시 여는 법
고전을 중간에 덮었다고 실패한 건 아니에요. 덜 미안하게 덮는 법, 몇 달 뒤에 덜 막막하게 다시 여는 법을 정리했어요. 프랑스 작가 페나크의 '독자의 권리'도 함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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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가 중간에 꽂힌 채 오래 놓인 책이 있나요? 다시 읽고 싶어도 어디까지 읽었는지 떠올리기 어려울 수 있어요. 덮을 때 짧은 메모를 남겨 두면, 나중에 돌아올 자리를 찾는 데 도움이 됩니다.
독자에게는 권리가 있어요
프랑스 작가 다니엘 페나크는 1992년에 펴낸 『소설처럼(Comme un roman)』에서 독자의 권리 열 가지를 적었어요. 첫째가 읽지 않을 권리, 둘째가 건너뛰며 읽을 권리, 그리고 셋째가 끝까지 읽지 않을 권리예요. 넷째는 다시 읽을 권리고요.
이 목록이 좋은 건 셋째와 넷째가 나란히 붙어 있다는 거예요. 중간에 덮어도 되고, 나중에 다시 열어도 된다. 둘은 서로 반대가 아니라 한 쌍이에요. 덮을 권리가 있어야 부담 없이 다시 열 수 있거든요.
덮는 건 실패가 아니라 판단이에요
2023년 국민 독서실태조사에서 성인의 연간 종합 독서량은 종이책·전자책·오디오북을 포함해 평균 3.9권이었어요. 독서를 어렵게 하는 이유로는 일 때문에 시간이 없다는 답이 가장 많았고, 스마트폰이나 게임 같은 다른 매체, 책 읽는 습관이 없다는 답이 뒤를 이었어요. 바쁜 사람이 지금 이 책과 맞지 않는다고 판단해서 내려놓는 건 꽤 합리적인 결정이에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 4권 7절에서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일러요.
판단을 걷어 내라. 그러면 '나는 해를 입었다'는 말도 걷힌다.
이걸 책에 대입하면 이래요. 덮었다는 사실은 그냥 사실이에요. 거기에 "나는 끈기가 없다", "나는 고전이 안 맞는 사람이다" 같은 판단을 덧붙이는 순간 상처가 돼요. 판단을 빼면 남는 건 "지금은 이 책을 안 읽는다" 한 줄뿐이죠.
덜 미안하게 덮는 법
그래도 덮는 데에도 요령이 있어요. 나중의 나를 위해서요.
덮기 전에 세 줄만 적기. 책 맨 뒤 빈 페이지나 휴대폰 메모에 이렇게요.
- 어디까지 읽었나: "3부 2장, 라주미힌이 아침에 깨어나는 장면"
- 지금 누가 무엇을 하고 있나: "어머니와 두냐가 페테르부르크에 왔음, 루쥔과의 약혼 문제로 시끄러움"
- 왜 덮나: "이사 준비로 정신없음" 또는 "솔직히 지루함"
마지막 줄이 중요해요. 바빠서 덮었는지 재미없어서 덮었는지에 따라 다시 여는 방법이 달라지거든요.
장이 시작하는 곳에 책갈피 꽂기. 장 한가운데서 멈췄더라도 책갈피는 그 장 첫머리에 옮겨 두세요. 몇 달 뒤에 문장 중간부터 다시 시작하는 건 생각보다 고역이에요.
책이 부담스럽다면 잠시 치워 두기. 볼 때마다 미안한 마음이 든다면 책장에 꽂아 두어도 괜찮아요. 다시 읽고 싶어질 때 메모를 보고 꺼내면 됩니다.
다시 여는 법
몇 주, 몇 달, 몇 년이 지나 문득 그 책이 생각나는 날이 와요. 그때는 이렇게 해 보세요.
세 줄 메모부터 읽기. 1분이면 돼요. 내가 어디서 무엇 때문에 멈췄는지 떠오르면 반은 돌아온 거예요.
바로 앞 장의 마지막 두세 쪽부터. 처음부터 다시 읽는 게 부담스럽다면 앞 장 끝을 조금 읽고 이어 가 보세요. 기억이 충분히 돌아오지 않으면 더 앞부분으로 옮겨도 됩니다.
인물 메모를 옆에 펼치기. 이름이 많은 소설이라면 주요 인물의 이름과 관계를 짧게 적어 두세요. 같은 인물이 여러 호칭으로 불릴 때 함께 표시해 두면 다시 읽을 때 참고하기 좋아요.
재미없어서 덮었다면, 건너뛰기. 페나크의 둘째 권리를 쓸 때예요. 지루했던 구간을 과감히 넘기고 다음 장으로 가세요. 고전이라고 한 쪽도 빼먹으면 안 된다는 규칙은 어디에도 없어요. 정말 궁금해지면 그때 돌아가면 되고요.
하루 20분으로 다시 재기. 하루 20분 계산법에서는 『죄와 벌』 본문을 약 43만 2천 글자, 읽기 속도를 분당 400글자로 놓고 54일로 계산했어요. 이 가정대로 반을 읽었다면 남은 분량은 27일입니다. 판본과 읽는 속도, 메모·재독 시간에 따라 실제 기간은 달라져요. 며칠 직접 읽어 본 속도로 계획을 조정해 보세요.
다른 책으로 갈아타도 돼요
다시 열었는데도 맞지 않으면 다른 책을 골라도 괜찮아요. 예전에 어렵던 책이 나중에는 다르게 읽힐 수도 있고요. 지금 관심이 가는 주제나 짧은 작품부터 읽으며, 그 책에 다시 돌아갈지는 천천히 정해 보세요.
『명상록』 12권 22절에는 판단을 걷어 낸 다음의 풍경이 이렇게 적혀 있어요.
그러면 곶을 돌아 나온 뱃사람처럼 너도 잔잔한 바다를 만날 것이다.
중간에 덮은 책도 나중에 다시 펼칠 수 있어요. 『명상록』처럼 짧은 단락으로 나뉜 책이라면 한 단락을 읽고 생각을 적는 방식도 써 볼 만합니다. 오늘 읽을 분량은 작게 잡아도 괜찮아요.
참고한 자료
- Techno-Science, "Comme un roman" (다니엘 페나크, 1992, 독자의 열 가지 권리): https://www.techno-science.net/glossaire-definition/Comme-un-roman.html
- 아주경제, 「성인 10명 중 6명, 1년에 책 한 권도 안 봐」 (2024.4.18): https://www.ajunews.com/view/20240418150436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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