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캐서린은 크리스마스까지 스러시크로스 그레인지에서 다섯 주를 머물렀는데, 그 무렵에는 발목도 말끔히 나았고 몸가짐도 몰라보게 나아져 있었다. 그동안 마님이 자주 찾아가서, 고운 옷과 칭찬으로 아가씨의 자존심을 북돋아 주는 데서부터 버릇 고치기 계획을 시작했는데, 아가씨는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래서 모자도 안 쓴 거친 꼬마 야만인이 집 안으로 뛰어들어 우리 모두를 숨이 막히도록 끌어안는 대신, 잘생긴 검은 조랑말에서 아주 의젓한 아가씨가 사뿐히 내려섰다. 깃털 장식을 단 비버 모자 밑으로는 갈색 고수머리가 흘러내렸고, 길게 끌리는 모직 승마복은 두 손으로 치켜들어야 미끄러지듯 걸어 들어올 수 있었다. 힌들리가 아가씨를 말에서 안아 내리며 신이 나서 외쳤다. "아니, 캐서린, 너 정말 미인이 됐구나!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다. 이제 숙녀 같아. 이저벨라 린턴 따위는 견줄 데가 못 되겠어, 안 그래, 프랜시스?" "이저벨라는 타고난 바탕이 이 애만 못하죠." 아내가 대답했다. "하지만 여기서 다시 거칠어지지 않게 조심해야 해요. 엘렌, 캐서린 아가씨 옷 벗는 것 좀 거들어요. 가만있어, 아가씨, 고수머리 흐트러지겠어요. 모자 끈은 내가 풀어 줄게요."
내가 승마복을 벗기자 그 밑에서 화려한 체크무늬 비단 드레스와 흰 속바지, 반짝반짝 윤을 낸 구두가 빛을 냈다. 개들이 반기며 뛰어오르자 아가씨는 기뻐서 눈을 반짝이면서도, 개들이 그 멋진 옷에 달려들어 비벼 댈까 봐 감히 쓰다듬지도 못했다. 아가씨는 내게 살며시 입을 맞추기만 했는데, 나는 크리스마스 과자를 만드느라 온통 밀가루투성이여서 나를 끌어안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히스클리프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힌들리 내외는 두 아이가 만나는 모습을 조마조마하게 지켜보았는데, 그것을 보면 두 동무를 떼어 놓는 일이 성공할 거라고 기대할 근거가 얼마나 있는지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을 거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히스클리프를 찾기가 어려웠는데, 캐서린이 집을 비우기 전에도 그 애는 몸단장에 무심했고 아무도 돌봐 주지 않았는데, 그 뒤로는 열 배나 더했다. 일주일에 한 번 더러운 녀석이라고 부르며 몸 좀 씻으라고 일러 주는 친절을 베푸는 사람조차 나 말고는 없었는데, 그 나이 또래 사내아이들은 본디 비누와 물을 즐기는 일이 드물다. 그러니 석 달 동안 진흙과 먼지 속에서 입고 지낸 옷이며 빗지도 않은 숱 많은 머리칼은 말할 것도 없고, 얼굴과 손까지 칙칙하게 때가 덮여 있었다. 자기처럼 머리가 부스스한 짝패가 들어올 거라고 예상했는데 그토록 환하고 우아한 아가씨가 들어서는 것을 보았으니, 그 애가 긴 의자 뒤로 숨어든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히스클리프는 여기 없어?" 아가씨가 장갑을 벗으며 물었는데, 드러난 손가락은 아무 일도 안 하고 집 안에만 있었던 덕에 놀랍도록 하얘져 있었다.
"히스클리프, 앞으로 나와도 좋다." 힌들리 도련님이 그 애의 낭패를 즐기며, 그 애가 얼마나 볼썽사나운 꼬마 불한당 꼴로 나서야 할지 생각하니 흐뭇하다는 듯 소리쳤다. "다른 하인들처럼 캐서린 아가씨께 어서 오시라고 인사드려도 좋다."
캐서린은 숨어 있는 동무를 언뜻 보고는 껴안으려고 날아가서, 눈 깜짝할 사이에 그 애의 뺨에 일고여덟 번 입을 맞추고는 멈칫하더니, 몸을 뒤로 빼며 웃음을 터뜨렸다. "어머, 너 어쩜 이렇게 새까맣고 뾰로통해 보이니! 게다가, 게다가 우습고 험상궂고! 하지만 그건 내가 에드거하고 이저벨라 린턴한테 익숙해져서 그런 거야. 그래, 히스클리프, 나를 잊었니?"
아가씨가 그렇게 물을 만도 했다. 부끄러움과 자존심이 그 애의 얼굴에 겹으로 그늘을 드리워서, 그 애는 그 자리에 박힌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악수해라, 히스클리프." 언쇼 씨가 선심 쓰듯 말했다. "가끔은 그래도 괜찮다."
"안 할 거예요." 그 애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웃음거리가 되려고 서 있지는 않을 거예요. 그런 건 못 참아요!"
그러고는 둘러싼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가려 했지만 캐서린 아가씨가 다시 그 애를 붙잡았다.
"너를 비웃으려던 게 아니야." 아가씨가 말했다. "그냥 참을 수가 없었어. 히스클리프, 악수라도 해! 왜 뿌루퉁해 있어? 네가 좀 이상해 보여서 그랬을 뿐이야. 얼굴 씻고 머리 빗으면 괜찮을 거야. 그런데 너 정말 더럽다!"
아가씨는 제 손에 쥔 거무튀튀한 손가락을 걱정스럽게 내려다보았고, 그 애 옷에 닿은 탓에 드레스가 조금도 고와지지 않았을까 봐 걱정스러운 듯 제 드레스도 내려다보았다.
"나를 만지지 말았어야지!" 그 애는 아가씨의 눈길을 따라가더니 손을 홱 빼며 대꾸했다. "내 마음대로 더러울 거야. 나는 더러운 게 좋고, 앞으로도 더러울 거야."
그 말과 함께 그 애는 고개를 숙이고 방에서 뛰쳐나갔고, 주인 내외는 재미있다고 웃었지만, 캐서린은 자기가 한 말이 어째서 그런 고약한 성깔을 터뜨렸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 몹시 당황했다.
새로 온 손님의 몸종 노릇을 해 주고, 과자를 화덕에 넣고, 크리스마스이브답게 큰방과 부엌에 불을 활활 지펴 환하게 꾸민 뒤, 나는 혼자 앉아서 캐럴이나 부르며 즐길 채비를 했다. 내가 고른 흥겨운 노래는 세속 노래나 다름없다는 조지프의 단언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조지프는 제 방에 들어가 혼자 기도를 드리고 있었고, 힌들리 내외는 아가씨의 마음을 끌려고 린턴네 아이들에게 그동안의 친절에 대한 답례로 주라며 사 온 갖가지 앙증맞은 장신구를 내보이고 있었다. 내외는 린턴네 아이들을 이튿날 워더링 하이츠에서 하루를 보내라고 초대했고, 초대는 받아들여졌는데 조건이 하나 붙었다. 린턴 부인이 자기 귀염둥이들을 '욕이나 하는 그 못된 녀석'과는 조심스럽게 떼어 놓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런 형편이라 혼자 남은 나는 데워지는 향신료의 짙은 냄새를 맡으며, 반짝이는 부엌살림과 호랑가시나무로 꾸민 반들반들한 시계와, 저녁 때 데운 맥주를 채우려고 쟁반에 늘어놓은 은잔들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특별히 공들여 돌보는 것, 박박 문질러 닦고 말끔히 쓴 티 한 점 없는 바닥을 바라보았다. 나는 속으로 그 하나하나에 아낌없이 박수를 보냈다. 그러다 언쇼 어른이 모든 것이 정돈되고 나면 들어와서 나더러 야무진 계집애라고 부르며 크리스마스 선물로 1실링을 손에 슬쩍 쥐여 주곤 하던 일이 떠올랐다. 그 생각은 주인 어른이 히스클리프를 얼마나 귀애했는지, 당신이 죽고 나면 그 애가 푸대접을 받을까 봐 얼마나 걱정했는지로 이어졌고, 그러다 보니 자연히 지금 그 가엾은 아이의 처지를 생각하게 되어 나는 노래를 부르려던 마음을 바꾸어 울어 버렸다. 그러나 곧, 그 애가 당한 부당한 일들을 두고 눈물을 흘리기보다는 그 일들을 조금이라도 바로잡으려고 애쓰는 편이 더 분별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일어나 그 애를 찾으러 마당으로 나갔는데, 그 애는 멀리 있지 않았다. 그 애는 마구간에서 새 조랑말의 윤기 나는 털을 쓰다듬고, 늘 하던 대로 다른 짐승들에게 먹이를 주고 있었다.
"서둘러, 히스클리프!" 내가 말했다. "부엌이 아주 아늑하고, 조지프는 위층에 있어. 서둘러. 캐서린 아가씨가 나오기 전에 내가 너를 말쑥하게 차려입혀 줄게. 그러면 둘이 같이 앉아 난롯가를 독차지하고 잘 때까지 실컷 수다를 떨 수 있잖아."
그 애는 하던 일을 계속할 뿐 내 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자, 올 거야, 안 올 거야?" 내가 말을 이었다. "너희 둘 몫으로 작은 과자가 하나씩 있어. 거의 넉넉하게. 그리고 너는 옷을 차려입는 데 반 시간은 걸릴 거야."
나는 5분을 기다렸지만 대답이 없어서 그 애를 두고 왔다. 그날 저녁 캐서린은 오빠 내외와 저녁을 먹었고, 조지프와 나는 한쪽은 꾸짖고 한쪽은 대드는 것으로 양념을 친 쌀쌀맞은 저녁을 함께 먹었다. 그 애 몫의 과자와 치즈는 밤새 요정들을 위해 식탁 위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고, 그 애는 아홉 시까지 일을 계속하더니 말 한마디 없이 뚱한 얼굴로 제 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캐서린은 새 친구들을 맞을 준비로 챙길 일이 산더미 같아서 늦게까지 깨어 있었는데, 옛 친구에게 말을 걸려고 한 번 부엌에 들어왔지만 그 애는 이미 가 버린 뒤였고, 아가씨는 그 애가 왜 그러느냐고 묻기만 하고 돌아갔다. 이튿날 아침 그 애는 일찍 일어나, 휴일이라 제 언짢은 기분을 황야로 끌고 나갔고, 식구들이 교회에 간 뒤에야 다시 나타났다. 굶으며 생각을 한 덕에 마음이 좀 풀렸는지, 그 애는 한동안 내 곁을 서성이더니 용기를 짜내 불쑥 외쳤다. "넬리, 나를 점잖게 만들어 줘. 착하게 굴 거야."
"이제야 철이 드는구나, 히스클리프." 내가 말했다. "너 정말 캐서린을 속상하게 했어. 아마 집에 돌아온 걸 후회하고 있을 거야! 캐서린이 너보다 더 귀한 대접을 받으니까 네가 샘을 내는 것처럼 보이잖아."
캐서린을 샘낸다는 생각은 그 애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캐서린을 속상하게 했다는 말은 똑똑히 알아들었다.
"캐서린이 속상하다고 했어?" 그 애가 아주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오늘 아침에 네가 또 나가 버렸다고 했더니 울더라."
"흥, 나는 어젯밤에 울었어." 그 애가 맞받았다. "그리고 나는 캐서린보다 울 이유가 더 많았어."
"그래, 너는 자존심만 잔뜩 부풀린 채 빈 배로 잠자리에 든 이유가 있었지." 내가 말했다. "자존심 센 사람은 스스로 서러운 슬픔을 만들어 내는 법이야. 그래도 그렇게 토라진 게 부끄럽다면, 알겠지, 캐서린이 들어오면 용서를 빌어야 해. 다가가서 입을 맞추겠다고 하고, 그리고 말하는 거야, 뭐라고 할지는 네가 제일 잘 알겠지. 다만 진심으로 해. 캐서린이 멋진 옷을 입었다고 낯선 사람이 돼 버린 것처럼 굴지 말고. 자, 이제 나도 저녁 준비를 해야 하지만 틈을 내서 너를 꾸며 줄게. 네 옆에 서면 에드거 린턴이 꼭 인형처럼 보이게. 정말 그렇다니까. 너는 그 애보다 어리지만, 장담하는데 키는 더 크고 어깨는 두 배나 넓어. 눈 깜짝할 사이에 때려눕힐 수 있을 거야. 그럴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히스클리프의 얼굴이 잠깐 환해졌다가 다시 흐려졌고, 그 애는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넬리, 내가 그 애를 스무 번 때려눕힌다 해도 그 애가 덜 잘생겨지거나 내가 더 잘생겨지지는 않잖아. 나도 머리칼이 밝고 살결이 희고, 그 애만큼 옷을 잘 입고 점잖게 굴고, 그 애가 앞으로 될 만큼 부자가 될 가망이 있으면 좋겠어!"
"그리고 걸핏하면 엄마를 찾으며 울고." 내가 덧붙였다. "시골 사내아이가 주먹만 쳐들어도 벌벌 떨고, 소나기 한 번에 온종일 집 안에만 처박혀 있고. 아, 히스클리프, 너 지금 참 못난 소리를 하는구나! 거울 앞으로 와 봐. 네가 무엇을 바라야 하는지 보여 줄게. 네 두 눈 사이에 있는 저 두 줄 주름이 보이니? 그리고 활처럼 휘어 올라가는 대신 가운데가 푹 꺼진 저 짙은 눈썹, 그리고 저 깊숙이 파묻힌 검은 악마 한 쌍, 창을 떳떳하게 활짝 여는 법 없이 마귀의 첩자처럼 그 밑에 숨어서 번득이는 저 눈. 저 시무룩한 주름을 펴고, 눈꺼풀을 시원하게 들어 올리고, 저 악마들을 아무것도 의심하지 않고 원수인지 확실하지 않으면 늘 친구로 보는, 자신 있고 순진한 천사로 바꾸기를 바라고, 그렇게 하는 법을 배워. 걷어차이는 게 마땅하다는 걸 알면서도 자기가 당하는 일 때문에 걷어찬 사람은 물론 온 세상을 미워하는 못된 똥개 같은 얼굴은 하지 마."
"다시 말해 에드거 린턴의 커다란 파란 눈과 반듯한 이마를 바라야 한다는 거구나." 그 애가 대답했다. "바라고 있어. 그런데 바란다고 그게 생기지는 않잖아."
"착한 마음씨가 있으면 고운 얼굴을 갖게 돼, 얘야." 내가 말을 이었다. "설령 네가 새까만 흑인이라 해도 말이야. 그리고 못된 마음씨는 가장 고운 얼굴도 못생긴 것보다 더 흉하게 만들어. 자, 이제 씻고 빗고 토라지는 것까지 다 끝났으니 말해 봐. 너 스스로 꽤 잘생겼다고 생각하지 않니? 나는 그렇게 생각해. 너는 변장한 왕자라 해도 손색이 없어. 네 아버지가 중국 황제였고 네 어머니가 인도 왕비였는지 누가 알아? 두 분 다 일주일 수입만으로 워더링 하이츠와 스러시크로스 그레인지를 한꺼번에 사들일 수 있는 부자였는데, 네가 못된 뱃사람들한테 납치당해서 잉글랜드로 끌려왔을지도 모르잖아. 내가 너라면 내 출생을 아주 높게 생각할 거야. 그렇게 내가 본래 어떤 사람인지 생각하면, 하찮은 농사꾼의 구박쯤은 꿋꿋하고 의젓하게 견뎌 낼 용기가 생길 테니까!"
그렇게 내가 재잘재잘 떠드는 사이에 히스클리프는 차츰 찌푸린 얼굴을 펴고 제법 상냥한 얼굴이 되어 갔는데, 그때 갑자기 덜컹거리는 소리가 길을 따라 올라와 마당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우리 이야기가 끊겼다. 그 애는 창으로, 나는 문으로 달려갔는데, 마침 린턴네 두 아이가 외투와 털옷에 폭 파묻힌 채 집안 마차에서 내리고, 언쇼 집안 식구들이 말에서 내리는 참이었다. 겨울에는 말을 타고 교회에 가는 일이 많았다. 캐서린이 두 아이의 손을 하나씩 잡고 집 안으로 데려와 불 앞에 앉히자, 하얗게 질려 있던 그 애들 얼굴에 금세 핏기가 돌았다.
나는 이제 서둘러 가서 상냥한 얼굴을 보여 주라고 동무를 재촉했고 그 애도 기꺼이 따랐는데, 운수 사납게도 그 애가 부엌에서 큰방으로 통하는 문을 이쪽에서 여는 순간 힌들리가 저쪽에서 문을 열었다. 둘이 딱 마주쳤고, 주인은 그 애가 깨끗하고 밝은 얼굴을 한 것을 보고 약이 올랐는지, 아니면 린턴 부인과 한 약속을 지키고 싶어 안달이 났는지, 그 애를 느닷없이 확 밀쳐 내고는 조지프에게 화난 목소리로 일렀다. "이 녀석을 방에 못 들어오게 해라. 식사가 끝날 때까지 다락방에 처넣어 둬. 잠깐이라도 혼자 두면 파이에 손가락을 쑤셔 넣고 과일을 훔쳐 먹을 놈이야."
"아니에요, 나리." 나는 대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애는 아무것도 손대지 않을 거예요, 절대로요. 그리고 그 애도 우리처럼 맛있는 음식을 제 몫만큼은 먹어야 하지 않겠어요?"
"날이 저물기 전에 아래층에서 얼씬거리다 걸리면 내 주먹 맛을 제 몫으로 먹게 될 거다." 힌들리가 소리쳤다. "꺼져, 이 떠돌이야! 뭐야! 멋쟁이 흉내를 내 보겠다고? 그 우아한 머리채를 내가 붙잡기만 해 봐라. 조금 더 길게 늘여 줄 테니!"
"이미 충분히 긴데요." 린턴 도련님이 문간에서 빼꼼 내다보며 말했다. "저러고도 머리가 안 아프다니 신기해요. 꼭 망아지 갈기처럼 눈을 덮었어요!"
도련님은 모욕할 생각 없이 한 말이었지만, 히스클리프의 사나운 성미는, 그때부터 이미 연적으로 미워하는 듯한 상대가 건방지게 구는 기색을 견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 애는 손에 맨 처음 잡힌 뜨거운 사과 소스 그릇을 움켜쥐고 말한 아이의 얼굴과 목에 정통으로 끼얹었고, 도련님은 당장 울음을 터뜨렸으며, 그 소리에 이저벨라와 캐서린이 허둥지둥 달려왔다. 언쇼 씨는 즉시 범인을 낚아채 제 방으로 끌고 갔고, 돌아왔을 때 얼굴이 벌겋고 숨이 가빴던 것을 보면 거기서 분명 그 격정을 식힐 거친 처방을 내렸을 것이다. 나는 행주를 가져와 에드거의 코와 입을 좀 심술궂게 박박 닦아 주며, 괜히 참견하더니 꼴좋다고 했다. 누이동생은 집에 가겠다고 울기 시작했고, 캐서린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모두를 대신해 얼굴을 붉히고 곁에 서 있었다.
"그 애한테 말을 걸지 말았어야죠!" 캐서린이 린턴 도련님을 나무랐다. "그 애는 기분이 안 좋았는데, 이제 당신 때문에 놀러 온 걸 망쳤어요. 그 애는 매를 맞을 거예요. 나는 그 애가 매 맞는 게 싫어요! 저녁도 못 먹겠어요. 왜 그 애한테 말을 걸었어요, 에드거?"
"안 걸었어요." 소년은 흐느끼며 내 손에서 빠져나가더니, 나머지 얼룩은 제 고운 삼베 손수건으로 마저 닦았다. "엄마한테 그 애하고는 한마디도 안 하겠다고 약속했고, 정말 안 했어요."
"그래, 울지 마요." 캐서린이 경멸하듯 대꾸했다. "죽은 것도 아니잖아요. 더는 말썽 피우지 말아요. 오빠가 와요. 조용히 해요! 쉿, 이저벨라! 너는 누가 때리기라도 했니?"
"자, 자, 얘들아, 자리에 앉아라!" 힌들리가 부산하게 들어오며 소리쳤다. "그 짐승 같은 녀석 덕에 몸이 아주 잘 데워졌다. 다음번엔 말이다, 에드거 도련님, 네 주먹으로 직접 법을 집행해라. 그러면 입맛도 돌 거다!"
향긋한 잔칫상을 보자 작은 손님들도 마음이 가라앉았는데, 아이들은 말을 타고 오느라 배가 고팠고 정말로 크게 다친 사람도 없었으니 쉽게 달래졌다. 언쇼 씨는 고기를 썰어 접시마다 푸짐하게 담아 주었고, 마님은 쾌활한 이야기로 아이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 나는 마님 의자 뒤에서 시중을 들고 있었는데, 캐서린이 눈물 한 방울 없이 무심한 얼굴로 제 앞에 놓인 거위 날개를 썰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 "정 없는 아이 같으니."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옛 놀이 동무의 괴로움을 저렇게 가볍게 털어 버리다니. 저렇게 이기적인 아이인 줄은 몰랐어." 아가씨는 한 입 떠서 입으로 가져가다가 도로 내려놓았고, 두 뺨이 붉어지더니 그 위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아가씨는 포크를 바닥에 떨어뜨리고는, 북받친 마음을 감추려고 얼른 식탁보 밑으로 몸을 숙였다. 나는 아가씨를 정 없는 아이라고 오래 부르지 않았다. 아가씨가 온종일 연옥에 있는 듯 괴로워하며, 혼자 있을 기회나 주인이 가둬 버린 히스클리프를 찾아가 볼 기회를 애타게 엿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 애가 갇혀 있다는 것은 내가 남몰래 음식을 좀 갖다주려다가 알게 되었다.
저녁에는 춤판이 벌어졌다. 캐서린은 이저벨라 린턴에게 짝이 없으니 이제 그 애를 풀어 달라고 졸랐지만 소용이 없었고, 그 빈자리를 메우는 일이 내게 떨어졌다. 우리는 신나게 몸을 움직이며 울적한 기분을 모두 털어 버렸고, 열다섯 명이나 되는 기머턴 악단이 찾아와 우리의 즐거움을 더해 주었다. 노래하는 사람들 말고도 트럼펫, 트롬본, 클라리넷, 바순, 호른, 그리고 커다란 저음 현악기까지 있었다. 악단은 해마다 크리스마스면 점잖은 집을 빠짐없이 돌며 사례를 받는데, 우리는 그들의 연주를 듣는 것을 최고의 대접으로 여겼다. 늘 부르는 캐럴을 다 부르고 나자 우리는 그들에게 노래와 돌림노래를 청했고, 마님이 음악을 무척 좋아해서 악단은 아낌없이 들려주었다.
캐서린도 음악을 좋아했지만 계단 꼭대기에서 들어야 가장 아름답게 들린다면서 어둠 속을 올라갔고, 나도 뒤따랐다.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 아래층에서는 우리가 없어진 줄도 모르고 큰방 문을 닫았다. 아가씨는 계단 꼭대기에 머물지 않고 더 올라가, 히스클리프가 갇힌 다락방까지 가서 그 애를 불렀다. 그 애는 한동안 고집스럽게 대답하지 않았지만, 아가씨가 끈질기게 부르고 또 불러서 마침내 둘은 널빤지를 사이에 두고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나는 노래가 곧 끝나고 노래꾼들이 다과를 들러 갈 때가 되었다 싶을 때까지 가엾은 두 아이가 방해받지 않고 이야기하게 내버려 두었다. 그러고 나서 아가씨에게 알리려고 사다리를 기어 올라갔는데, 바깥에 있어야 할 아가씨의 목소리가 안에서 들렸다. 그 꼬마 원숭이가 한 다락방의 천창으로 기어 나가 지붕을 타고 다른 다락방의 천창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나는 아가씨를 다시 꾀어 나오게 하느라 이만저만 애를 먹은 게 아니었다. 아가씨가 나올 때 히스클리프도 함께 나왔고, 아가씨는 그 애를 부엌으로 데려가라고 나를 졸랐다. 마침 동료 하인은 우리의 '마귀의 찬송가', 그가 그렇게 부르기를 좋아했는데, 그 소리를 피해 이웃집에 가고 없었다. 나는 너희의 장난을 부추길 생각은 조금도 없다고 말하면서도, 갇힌 아이가 어제 점심 이후로 아무것도 먹지 못했으니 이번 한 번만은 그 애가 힌들리 도련님을 속이는 것을 눈감아 주겠다고 했다. 그 애가 아래로 내려가자 나는 불가에 걸상을 놓아 주고 맛있는 것을 잔뜩 내주었지만, 그 애는 속이 메스꺼워서 별로 먹지 못했고 그 애를 달래려던 내 노력은 헛수고가 되었다. 그 애는 두 팔꿈치를 무릎에 얹고 두 손으로 턱을 괸 채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묻자 그 애는 심각하게 대답했다. "힌들리한테 어떻게 갚아 줄지 정하는 중이야. 끝내 갚아 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오래 기다리든 상관없어. 그놈이 내가 갚아 주기 전에 죽지만 않으면 좋겠어!"
"부끄러운 줄 알아, 히스클리프!" 내가 말했다. "못된 사람을 벌하는 건 하느님이 하실 일이야. 우리는 용서하는 법을 배워야 해."
"아니, 하느님은 내가 맛볼 만족을 맛보지 못하실 거야." 그 애가 맞받았다. "가장 좋은 방법만 알면 좋겠는데! 나를 내버려 둬. 내가 다 계획해 놓을 테니까. 그 생각을 하는 동안에는 아프지가 않아."
그런데 록우드 나리, 이런 이야기가 나리께 재미있을 리 없다는 걸 깜빡했네요. 제가 어쩌자고 이렇게 끝도 없이 수다를 떨 생각을 했는지 속이 상해요. 죽은 식어 버렸고 나리는 졸려서 꾸벅꾸벅하시는데요! 히스클리프의 내력은 나리께서 들으셔야 할 것만 추리면 대여섯 마디로 다 말씀드릴 수 있었을 텐데요.
가정부는 그렇게 스스로 말을 끊고 일어서서 바느질거리를 치우려 했다. 그러나 나는 화롯가에서 꼼짝도 할 수 없을 것 같았고, 졸기는커녕 정신이 말똥말똥했다. "그대로 앉아 계시오, 딘 부인." 내가 외쳤다. "제발 반 시간만 더 앉아 계시오. 이야기를 느긋하게 들려준 건 아주 잘한 일이오. 나는 그런 이야기가 좋소. 끝까지 같은 투로 들려줘야 하오. 부인이 이야기한 인물들 하나하나에게 나는 많든 적든 다 흥미가 있소."
"시계가 곧 열한 시를 칠 거예요, 나리."
"상관없소. 나는 한밤중에 잠자리에 드는 버릇이 없소. 아침 열 시까지 누워 있는 사람한테는 새벽 한두 시도 이른 거요."
"열 시까지 누워 계시면 안 되지요. 아침 가운데 가장 좋은 때는 그보다 훨씬 전에 지나가 버리는걸요. 열 시까지 하루 일의 절반을 끝내지 못한 사람은 나머지 절반도 못다 하고 남기기 십상이에요."
"그래도 딘 부인, 다시 앉으시오. 내일은 밤을 오후까지 늘일 작정이니까. 적어도 고약한 감기쯤은 걸리리라고 나 스스로 예언하는 바요."
"그러지 않으시면 좋겠네요, 나리. 그럼 한 세 해쯤은 건너뛰게 해 주셔야겠어요. 그동안 언쇼 부인은……"
"아니, 아니, 그런 건 하나도 허락 못 하오! 혼자 앉아 있는데 눈앞의 깔개 위에서 어미 고양이가 새끼를 핥고 있으면, 그 일을 어찌나 골똘히 지켜보는지 어미가 한쪽 귀를 빼먹기라도 하면 정말로 기분이 상하는 그런 마음 상태를 아시오?"
"지독하게 게으른 마음 상태라고 하겠네요."
"천만에, 지칠 만큼 부지런한 마음 상태요. 지금 내가 바로 그런 상태이니, 하나도 빼놓지 말고 꼼꼼하게 이어 가시오. 이 지방 사람들이 도시 사람들보다 지니는 값어치란, 지하 감옥의 거미가 오두막의 거미보다 각자 그곳에 사는 사람에게 지니는 값어치와 같은 것 같소. 그렇다고 그렇게 깊어진 매력이 순전히 구경하는 사람의 처지 때문만은 아니오. 이곳 사람들은 정말로 더 진지하게, 더 제 안에서 살고, 겉모습이나 변화나 바깥의 시시한 일에는 덜 매여 사오. 한 해를 넘긴 사랑 따위는 절대로 믿지 않던 나인데도, 여기서라면 평생 가는 사랑도 거의 있을 법하다는 생각이 드오. 한쪽은 배고픈 사람 앞에 요리 한 접시만 놓아 주는 것과 같아서, 그 사람은 입맛을 그 한 접시에 다 쏟아 제대로 맛볼 수 있지. 다른 쪽은 프랑스 요리사들이 차려 놓은 식탁 앞으로 그 사람을 데려가는 것과 같소. 어쩌면 그 사람도 전체에서 그만큼 즐거움을 뽑아낼 수는 있겠지만, 하나하나의 요리는 그 사람의 눈과 기억에 티끌 하나에 지나지 않을 거요."
"아! 여기 사람들도 알고 보면 다른 데 사람들과 똑같아요." 딘 부인이 내 말에 좀 어리둥절해하며 말했다.
"실례지만" 하고 내가 대꾸했다. "나의 좋은 친구여, 부인이야말로 그 말이 틀렸다는 뚜렷한 증거요. 대수롭지 않은 사투리 몇 가지를 빼면, 부인에게는 내가 부인 같은 계층의 사람들에게 으레 있다고 여겨 온 몸가짐이 하나도 보이지 않소. 부인은 틀림없이 보통 하인들보다 훨씬 많이 생각하며 살아왔을 거요. 시시한 일로 삶을 흘려보낼 기회가 없었으니 곰곰이 생각하는 힘을 기를 수밖에 없었던 거지요."
딘 부인이 웃었다.
"제가 차분하고 분별 있는 축에 든다고는 저도 자부해요." 부인이 말했다. "꼭 언덕에 묻혀 살면서 한 해가 다 가도록 같은 얼굴들만 보고 같은 일만 되풀이하는 걸 봐 와서 그런 건 아니고, 따끔하게 단련을 받은 덕에 지혜가 좀 생겼지요. 그리고 록우드 나리, 저는 나리 생각보다 책을 많이 읽었어요. 이 서재에서 나리가 펼쳐 보실 책 가운데 제가 들여다보고 뭐라도 얻어 내지 않은 책은 없을 거예요. 저기 저 그리스어 책하고 라틴어 책 줄, 그리고 프랑스어 책 줄만 빼고요. 그래도 그 책들이 어느 게 어느 건지는 구별할 줄 알아요. 가난한 사람의 딸한테 그 이상은 바라실 수 없겠지요. 아무튼 진짜 수다쟁이답게 이야기를 따라가야 한다면 어서 계속하는 게 좋겠네요. 세 해를 건너뛰는 대신 이듬해 여름, 그러니까 거의 스물세 해 전인 1778년 여름으로 넘어가는 것으로 만족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