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장
1802년. 이번 구월에 나는 북쪽에 사는 친구에게서 그 집 황야에 와서 사냥으로 쑥대밭을 만들어 달라는 초대를 받았는데, 그의 집으로 가는 길에 뜻하지 않게 기머턴에서 15마일 안쪽까지 오게 되었다. 길가 주막의 마부가 내 말들에게 물 한 통을 들이대어 목을 축여 주고 있는데, 갓 베어 낸 아주 푸른 귀리를 실은 수레 한 대가 지나가자 그가 한마디 했다. "저건 기머턴에서 오는 거구먼, 그려! 그 동네는 늘 남들보다 추수가 세 주씩 늦는구먼."
"기머턴?" 나는 되풀이했다. 그 고장에 머물렀던 일이 벌써 흐릿하고 꿈결 같아져 있었다. "아! 알지. 여기서 얼마나 멀지?"
"언덕 넘어 14마일쯤 되겄소. 길도 험하고." 그가 대답했다.
갑자기 스러시크로스 그레인지에 가 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아직 한낮도 되지 않았으니 여관에서 묵느니 내 집 지붕 아래에서 밤을 보내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하루쯤은 쉽게 내서 집주인과 일을 매듭지을 수 있었고, 그러면 그 근방에 또 쳐들어가는 수고를 덜 수 있었다. 잠시 쉬고 나서 나는 하인에게 마을로 가는 길을 물어 오게 했고, 짐승들을 몹시 지치게 하면서 세 시간쯤 걸려 그 거리를 해냈다.
나는 하인을 거기 남겨 두고 혼자 골짜기를 내려갔다. 잿빛 교회는 더 잿빛으로 보였고 외로운 교회 묘지는 더 외로워 보였다. 황야 양 한 마리가 무덤 위의 짧은 풀을 뜯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달콤하고 따뜻한 날씨였는데, 여행하기에는 너무 더웠지만 그 더위도 위아래로 펼쳐진 기분 좋은 경치를 즐기는 데는 방해가 되지 않았고, 팔월에 더 가까울 때 이 경치를 보았더라면 틀림없이 그 적막 속에서 한 달쯤 허송하고 싶은 유혹에 빠졌을 것이다. 언덕에 갇힌 그 골짜기들과 깎아지른 듯 우뚝 솟은 히스 벌판의 굽이만큼 겨울에 음울한 것도 없고, 여름에 거룩한 것도 없다.
나는 해가 지기 전에 그레인지에 닿아 들여보내 달라고 문을 두드렸지만, 부엌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가느다란 푸른 연기 한 줄기로 짐작하건대 집안사람들은 뒤채로 물러가 있어서 내 소리를 듣지 못했다. 나는 말을 탄 채 마당으로 들어갔다. 현관 차양 밑에 아홉 살이나 열 살쯤 된 여자아이가 앉아 뜨개질을 하고 있었고, 늙은 여자 하나가 현관 계단에 비스듬히 기대어 생각에 잠긴 듯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딘 부인은 안에 있소?" 나는 그 노파에게 물었다.
"딘 부인 말이오? 아니요!" 노파가 대답했다. "그 사람은 여기 안 살우. 하이츠에 가 있구려."
"그럼 당신이 가정부요?" 내가 말을 이었다.
"그렇소, 내가 집을 보고 있소." 노파가 대답했다.
"그렇다면, 나는 이 집 주인인 록우드요. 내가 묵을 방이 있겠소? 오늘 밤 여기서 묵고 싶은데."
"쥔 나리라고요!" 노파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아니, 나리가 오실 줄 누가 알았겄소? 기별이라도 주셨어야지. 이 집엔 마른 데도 번듯한 데도 하나 없소. 하나도 없다니까!"
노파는 담뱃대를 내던지고 부산하게 안으로 들어갔고, 여자아이가 뒤따랐고, 나도 들어갔다. 노파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과, 게다가 반갑지 않은 내가 불쑥 나타나는 바람에 노파가 거의 넋이 나갔다는 것을 곧 알아차리고 나는 진정하라고 일렀다. 나는 산책을 하러 나갈 테니 그동안 거실 한구석에 저녁 먹을 자리와 잠잘 침실을 마련해 보라고 했다. 쓸고 먼지 털 것 없이, 불만 잘 피우고 마른 홑이불만 있으면 된다고 했다. 노파는 최선을 다하려는 것 같았지만, 부지깽이인 줄 알고 난로 솔을 쇠살대에 쑤셔 넣는가 하면 제 살림 도구 몇 가지를 엉뚱하게 쓰기도 했지만, 나는 그래도 내가 돌아올 때까지는 쉴 곳을 마련해 놓으리라고 노파의 열성을 믿고 물러 나왔다. 내가 생각한 나들이의 목적지는 워더링 하이츠였다. 마당을 벗어났을 때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 나는 다시 돌아갔다.
"하이츠는 다 잘 지내오?" 나는 노파에게 물었다.
"그렇소, 내가 아는 한은!" 노파는 뜨거운 재가 담긴 냄비를 들고 종종걸음으로 가며 대답했다.
딘 부인이 왜 그레인지를 떠났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런 판국에 노파를 붙잡아 둘 수는 없었으므로, 나는 돌아서서 집을 나서서, 등 뒤로는 지는 해가 빛을 내뿜고 앞으로는 떠오르는 달이 은은하게 빛나는 가운데, 하나는 스러지고 하나는 밝아지는 그 사이를 나는 느긋하게 걸어 영지를 벗어나서 히스클리프 씨의 집으로 갈라지는 돌투성이 샛길을 올라갔다. 집이 보이는 데까지 가기도 전에 낮의 흔적이라고는 서쪽 하늘을 따라 남은 빛줄기 없는 호박색 빛뿐이었지만, 그 휘황한 달빛 덕분에 길 위의 조약돌 하나, 풀잎 하나까지 다 보였다. 대문을 기어오를 필요도 두드릴 필요도 없었다. 손을 대자 대문이 열렸다. 나아진 점이로군,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코 덕분에 또 하나 나아진 점을 알아챘는데, 소박한 과일나무들 사이에서 비단향꽃무와 꽃무의 향기가 바람에 실려 왔다.
문도 격자창도 다 열려 있었지만, 탄광 지방에서 흔히 그렇듯 굴뚝에는 붉은 불길이 환하게 타오르고 있었는데, 그 불을 보며 눈이 얻는 위안 덕분에 덤으로 따라오는 더위도 견딜 만한 법이다. 그러나 워더링 하이츠의 큰방은 아주 넓어서 집안사람들이 그 불기운에서 얼마든지 멀찍이 물러나 있을 수 있었으므로, 거기 있는 사람들은 창 하나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나는 들어가기 전에 그 사람들을 보고 이야기하는 소리도 들을 수 있었으므로 그대로 보고 들었는데, 서성이는 동안 점점 커지는 호기심과 부러움이 뒤섞인 마음에 이끌려서였다.
"반-대!" 은방울처럼 고운 목소리가 말했다. "그게 세 번째야, 이 멍청아! 다시는 안 가르쳐 줄 거야. 잘 기억해, 안 그러면 머리카락을 잡아당길 거야!"
"그럼, 반대." 또 하나의 목소리가 낮지만 부드러워진 말투로 대답했다. "자, 이렇게 잘 기억했으니까 입 맞춰 줘."
"싫어. 먼저 하나도 틀리지 말고 처음부터 제대로 읽어 봐."
남자가 읽기 시작했는데, 점잖게 옷을 차려입고 탁자 앞에 앉아 책을 펴 놓은 젊은이였다. 그의 잘생긴 얼굴은 기쁨으로 빛났고, 눈은 자꾸만 조바심을 치며 책장에서 그의 어깨 너머에 있는 작고 흰 손으로 헤매었는데, 그 손은 주인이 그런 딴전의 기색을 알아챌 때마다 뺨을 찰싹 때려서 그를 불러들였다. 그 손의 주인은 뒤에 서 있었는데, 그의 공부를 살피려고 몸을 숙일 때마다 밝게 빛나는 그 고수머리가 이따금 그의 갈색 머리칼에 섞여 들었고, 그 얼굴은, 그가 그 얼굴을 볼 수 없는 게 다행이었는데, 보았더라면 그렇게 차분히 있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볼 수 있었고, 그래서 그 사람을 사로잡는 아름다움을 멍하니 바라보는 것 말고 다른 무언가를 할 수도 있었을 기회를 내던져 버렸다는 생각에 분해서 입술을 깨물었다.
과제는 끝났는데, 또 몇 군데 틀리기는 했지만 학생은 상을 달라고 해서 적어도 다섯 번은 입맞춤을 받았고, 그러면서도 그 입맞춤을 아낌없이 되돌려 주었다. 그러더니 두 사람은 문 쪽으로 왔고, 나누는 이야기로 짐작하건대 밖으로 나가 황야를 거닐려는 참이었다. 그때 내가 불운한 이 몸을 그 근처에 드러냈다가는 헤어턴 언쇼의 입으로는 아니더라도 그 마음속에서는 지옥 맨 밑바닥에 떨어지라는 선고를 받으리라고 나는 짐작했고, 몹시 비열하고 심술궂은 기분이 되어 부엌으로 피하려고 슬그머니 돌아갔다. 그쪽도 가로막는 것 없이 들어갈 수 있었는데, 문간에는 내 옛 친구 넬리 딘이 앉아서 바느질을 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그 노래는 안에서 들려오는 거칠게 비웃고 못마땅해하는 말소리에 자주 끊겼는데, 그 말소리는 음악과는 거리가 먼 가락이었다.
"아침부터 밤까지 귓가에서 욕지거리를 듣는 게 차라리 백번 낫지, 네 그 노랫소리는 듣고 싶지 않구먼!" 넬리가 한 말은 들리지 않았지만 그 대꾸로 부엌을 차지한 사람이 말했다. "그 거룩한 성경을 펴기만 하면 네가 사탄을 기리는 그 노래하고 이 세상에 생겨난 온갖 소름 끼치는 죄악을 죄다 늘어놓으니, 이건 이만저만한 망신이 아니여! 아! 넌 정말 쓸모없는 것이고 그 계집애도 마찬가지니, 저 불쌍한 녀석은 너희 둘 틈에서 망하고 말겄구먼. 불쌍한 녀석!" 그는 신음하며 덧붙였다. "그 녀석은 홀렸어. 암, 틀림없구먼. 오, 주여, 저것들을 심판하소서. 우리 윗사람들한테는 법도 정의도 없구먼!"
"그렇겠지! 아니면 우린 벌써 활활 타는 장작더미 위에 앉아 있었을 테니까." 노래하던 이가 받아쳤다. "하지만 쉿, 영감, 그리스도인답게 성경이나 읽고 나는 상관하지 마. 이건 「요정 애니의 혼례」라는 고운 곡인데, 춤출 때 부르는 노래야."
딘 부인이 다시 노래를 시작하려는 참에 내가 다가갔다. 부인은 곧바로 나를 알아보고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아이고, 세상에, 록우드 나리! 어떻게 이렇게 불쑥 돌아오실 생각을 하셨어요? 스러시크로스 그레인지는 다 닫아 두었는데요. 미리 알려 주셨어야지요!"
"머무는 동안 지낼 곳은 거기 마련해 두었소." 내가 대답했다. "내일 다시 떠날 거요. 그런데 딘 부인, 어떻게 여기로 옮겨 오게 되었소? 그 얘기 좀 해 주시오."
"질라가 떠나서 나리가 런던으로 가시고 얼마 안 되어 히스클리프 씨가 나더러 여기 와서 나리가 돌아오실 때까지 있으라고 했어요. 그건 그렇고, 어서 들어오세요! 오늘 저녁에 기머턴에서 걸어오셨어요?"
"그레인지에서 왔소." 내가 대답했다. "거기서 내 잠자리를 마련하는 동안 부인네 주인과 볼일을 마무리 짓고 싶소. 서둘러 다시 기회를 만들 생각은 없으니까."
"무슨 볼일이세요, 나리?" 넬리가 나를 큰방으로 안내하며 말했다. "그분은 지금 나가고 없고 곧 돌아오지도 않을 거예요."
"집세 문제요." 내가 대답했다.
"아! 그럼 히스클리프 부인하고 셈을 하셔야 해요." 부인이 말했다. "아니, 그보다는 나하고 하셔야지요. 아가씨는 아직 제 일을 처리하는 법을 배우지 못해서 내가 대신 맡아 하고 있어요. 다른 사람이 아무도 없거든요."
나는 놀란 얼굴을 했다.
"아! 히스클리프 씨가 죽었다는 소식을 못 들으셨군요." 부인이 말을 이었다.
"히스클리프가 죽었다고!" 나는 깜짝 놀라 외쳤다. "언제?"
"석 달 전이에요. 그건 그렇고 앉으세요, 모자 이리 주시고요. 다 말씀드릴게요. 잠깐만요, 아무것도 안 드셨지요?"
"아무것도 필요 없소. 집에 저녁을 시켜 두었으니까. 부인도 앉으시오. 그 사람이 죽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소! 어떻게 된 일인지 들려주시오. 젊은 사람들은 한동안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했지요?"
"네, 저녁마다 늦게까지 쏘다닌다고 나무라는데도 내 말은 들은 척도 안 해요. 그럼 우리 집 묵은 맥주라도 한잔 드세요. 몸에 좋을 거예요. 피곤해 보이시네요."
내가 사양하기도 전에 부인은 서둘러 맥주를 가지러 갔고, 조지프가 이렇게 묻는 소리가 들렸다. "그 나이에 사내들을 꾀어 들이다니 이게 통곡할 망신 아니겄어? 게다가 쥔 나리 술 창고에서 술 단지까지 꺼내 가다니! 가만히 서서 그 꼴을 보고 있자니 내가 다 창피해 죽겄구먼."
부인은 대꾸하려고 멈춰 서지도 않고 곧 거품이 넘치는 은 맥주잔을 들고 다시 들어왔고, 나는 그 맛을 마땅히 진심을 다해 칭찬했다. 그러고 나서 부인은 히스클리프의 이야기 그 뒷부분을 들려주었다. 부인의 말을 빌리면 그는 '기이한' 최후를 맞았다.
나리가 우리를 떠나시고 두 주도 안 되어 나는 워더링 하이츠로 불려 갔어요, 하고 부인은 말했다. 나는 캐시를 위해서 기꺼이 따랐다. 처음 아가씨를 만났을 때 나는 마음이 아프고 깜짝 놀랐는데, 헤어진 뒤로 아가씨가 그만큼 많이 변해 있었다. 히스클리프 씨는 왜 마음을 바꿔 나를 여기 오게 했는지 까닭은 밝히지 않았고, 그저 내가 필요하고 캐시를 보는 데 진력이 났다고 하면서, 나더러 작은 응접실을 내 거처로 삼고 아가씨를 내 곁에 데리고 있으라고 했다. 하루에 한두 번 아가씨를 보는 것만도 그에게는 충분하고도 남았다. 아가씨는 이렇게 된 것을 기뻐하는 것 같았고, 나는 그레인지에서 아가씨가 즐기던 책이며 다른 물건들을 조금씩 많이 몰래 들여왔으며, 우리가 그런대로 편하게 지낼 수 있겠다고 스스로 흐뭇해했다. 그 착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처음에는 만족하던 캐시가 얼마 안 되어 짜증을 내고 안절부절못하게 되었다. 하나는 아가씨가 정원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되어 있어서 봄이 다가오는데 그 좁은 울 안에 갇혀 있는 것이 몹시 속을 태웠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내가 집안일을 돌보느라 아가씨 곁을 자주 떠나야 해서 아가씨가 외롭다고 투덜거렸기 때문이다. 아가씨는 혼자 조용히 앉아 있느니 부엌에서 조지프와 다투는 쪽을 더 좋아했다. 나는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것은 상관하지 않았다. 그러나 주인이 큰방을 혼자 쓰고 싶어 할 때면 헤어턴도 부엌으로 와야 할 때가 많았는데, 처음에는 아가씨가 헤어턴이 다가오면 부엌을 떠나거나 조용히 내 일을 거들며 헤어턴을 두고 말을 하거나 헤어턴에게 말을 거는 것을 피했고, 헤어턴도 늘 더할 나위 없이 뚱하고 말이 없었지만, 얼마 지나자 아가씨는 태도를 바꾸어 헤어턴을 가만 내버려 두지를 못했다. 들으라는 듯이 빈정거리고, 그가 멍청하고 게으르다고 꼬집고, 어떻게 그런 삶을 견디는지, 어떻게 저녁 내내 불만 바라보며 꾸벅꾸벅 졸 수 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저 애는 꼭 개 같아, 안 그래, 엘렌?" 아가씨가 한번은 그렇게 말했다. "아니면 짐수레 끄는 말이든가? 일하고, 먹고, 끝도 없이 자기만 하잖아! 마음속이 얼마나 텅 비고 음울할까! 헤어턴, 너도 꿈을 꾸니? 꾼다면 무슨 꿈이야? 하지만 너는 나하고 말을 못 하지!"
그러고는 아가씨가 헤어턴을 쳐다보았지만, 헤어턴은 입을 열지도 다시 쳐다보지도 않았다.
"어쩌면 지금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몰라." 아가씨가 말을 이었다. "주노가 어깨를 씰룩이듯이 어깨를 씰룩였어. 물어봐, 엘렌."
"아가씨가 얌전히 굴지 않으면 헤어턴 도련님이 주인 나리한테 아가씨를 위층으로 올려 보내라고 할 거예요!" 내가 말했다. 헤어턴은 어깨를 씰룩였을 뿐 아니라, 그 주먹을 쓰고 싶은 듯이 주먹까지 꽉 쥐고 있었다.
"내가 부엌에 있을 때 헤어턴이 왜 한마디도 안 하는지 알아." 또 한번은 아가씨가 외쳤다. "내가 비웃을까 봐 겁이 나는 거야. 엘렌, 어떻게 생각해? 저 애가 한번은 혼자 글 읽기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내가 웃었다고 책을 불태우고 그만둬 버렸어. 바보 아니야?"
"아가씨가 짓궂었던 건 아니고요?" 내가 말했다. "그것부터 대답해 봐요."
"그랬을지도 몰라." 아가씨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저 애가 그렇게 어리석게 굴 줄은 몰랐어. 헤어턴, 내가 책을 주면 이제는 받을래? 어디 해 볼게!"
아가씨는 읽고 있던 책 한 권을 헤어턴의 손에 얹었는데, 헤어턴은 그것을 내던지고는 그만두지 않으면 목을 부러뜨려 버리겠다고 중얼거렸다.
"그럼 여기 탁자 서랍에 넣어 둘게." 아가씨가 말했다. "나는 자러 갈 거야."
그러고는 헤어턴이 그 책에 손을 대는지 지켜보라고 나한테 속삭이고는 가 버렸다. 그러나 헤어턴은 그 책 가까이 가려고도 하지 않았고, 아침에 내가 그렇게 알려 주자 아가씨는 몹시 실망했다. 나는 아가씨가 헤어턴의 끈질긴 뚱함과 게으름을 안타까워한다는 것을 알았는데, 헤어턴이 스스로 나아지려는 것을 겁주어 그만두게 했다고 아가씨의 양심이 아가씨를 나무랐고, 아가씨는 정말로 그 일을 단단히 해낸 셈이었다. 그러나 아가씨는 그 상처를 바로잡으려고 꾀를 짜냈다. 내가 다림질을 하거나 응접실에서는 하기 어려운 그런 붙박이 일을 하고 있으면 아가씨는 재미있는 책을 가져와서 나한테 소리 내어 읽어 주곤 했다. 헤어턴이 거기 있으면 아가씨는 대개 재미있는 대목에서 읽기를 멈추고 책을 아무렇게나 놓아두었는데, 그런 일을 몇 번이고 되풀이했지만, 헤어턴은 노새처럼 고집이 세서 아가씨가 던진 미끼를 덥석 물기는커녕, 비 오는 날이면 조지프와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고, 두 사람은 난로 양쪽에 하나씩 앉아 태엽 인형처럼 앉아 있었는데, 늙은 쪽은 다행히 귀가 너무 어두워서 자기 말대로라면 아가씨의 그 못된 헛소리를 알아듣지 못했고, 젊은 쪽은 그 소리를 못 들은 척하느라 애를 썼다. 날씨가 좋은 저녁이면 젊은 쪽은 사냥을 나갔고, 캐시는 하품을 하고 한숨을 쉬며 이야기를 해 달라고 나를 졸랐다가 내가 이야기를 시작하자마자 마당이나 정원으로 뛰쳐나갔고, 마지막 수단으로는 울면서 사는 게 지겹다고, 자기 삶은 쓸모가 없다고 했다.
히스클리프 씨는 점점 더 사람을 싫어하게 되어서 언쇼를 자기 방에서 거의 내쫓다시피 했다. 삼월 초에 일어난 사고 때문에 언쇼는 며칠 동안 부엌에 붙박여 지냈다. 혼자 언덕에 나가 있다가 총이 터졌는데, 파편에 팔을 베어서 집에 닿기도 전에 피를 꽤 많이 흘렸다. 그 바람에 언쇼는 상처가 아물 때까지 어쩔 수 없이 난롯가에서 조용히 지내야 했다. 그가 거기 있는 것이 캐시에게는 마음에 들었는데, 아무튼 그 때문에 아가씨는 위층 제 방을 어느 때보다 더 싫어하게 되었고, 나를 따라 내려올 수 있도록 나더러 아래층에서 할 일을 찾아내라고 졸라 대곤 했다.
부활절 다음 월요일에 조지프는 소 몇 마리를 끌고 기머턴 장에 갔고, 오후에 나는 부엌에서 빨래를 손질하느라 바빴다. 언쇼는 여느 때처럼 시무룩하게 난롯가 구석에 앉아 있었고, 우리 작은 아가씨는 유리창에 그림을 그리며 한가한 시간을 달래고 있었는데, 노래를 흥얼거리다 삼키고, 속삭이듯 무어라 혼잣말을 하고, 짜증스럽고 조바심 나는 눈길로 사촌 쪽을 흘끗거리며 심심풀이에 변화를 주었지만, 사촌은 꿋꿋이 담배를 피우며 난로 쇠살대만 들여다보았다. 아가씨가 계속 빛을 가리면 일을 못 하겠다고 내가 한마디 하자, 아가씨는 난롯돌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나는 아가씨가 무엇을 하는지 별로 눈여겨보지 않았는데, 이윽고 아가씨가 이렇게 말을 꺼내는 소리가 들렸다. "있잖아, 헤어턴, 나는 알게 됐어, 나는 네가…… 나는 기뻐…… 네가 나한테 그렇게 성질부리고 거칠게 굴지만 않았으면, 이제는 네가 내 사촌이었으면 좋겠어."
헤어턴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헤어턴, 헤어턴, 헤어턴! 듣고 있어?" 아가씨가 말을 이었다.
"저리 가!" 헤어턴이 한 치도 양보 없이 퉁명스럽게 으르렁거렸다.
"그 담뱃대 이리 줘." 아가씨는 조심스레 손을 내밀어 헤어턴의 입에서 담뱃대를 빼내며 말했다.
헤어턴이 되찾으려고 손을 쓰기도 전에 담뱃대는 부러져서 불 뒤로 들어가 있었다. 헤어턴은 아가씨에게 욕을 퍼붓고 다른 담뱃대를 집어 들었다.
"잠깐." 아가씨가 소리쳤다. "먼저 내 말을 들어야 해. 그 연기구름이 내 얼굴 앞에서 떠다니면 말을 할 수가 없어."
"악마한테나 가 버려!" 헤어턴이 사납게 외쳤다. "그리고 나 좀 가만 놔둬!"
"싫어." 아가씨가 고집했다. "안 가. 어떻게 해야 네가 나하고 말을 할지 모르겠는데 너는 알아듣지 않기로 작정했잖아. 내가 너더러 멍청하다고 할 때 아무 뜻도 없는 거야. 너를 경멸한다는 뜻이 아니야. 자, 나를 좀 봐 줘, 헤어턴. 너는 내 사촌이니까 나를 사촌으로 인정해야 해."
"너하고 네 그 더러운 자존심하고 그 빌어먹을 놀려 대는 짓거리하고는 아무 상관도 안 하겄어!" 헤어턴이 대답했다. "다시 너를 곁눈질이라도 하느니 몸이고 영혼이고 지옥에 떨어지는 게 낫겄어. 썩 비켜, 지금 당장!"
캐시는 얼굴을 찡그리고 입술을 깨물며 창가 자리로 물러가서, 괴상한 가락을 흥얼거리며 차츰 북받쳐 오르는 울음을 감추려고 애썼다.
"아가씨가 버릇없이 군 걸 뉘우치고 있으니 사촌하고 사이좋게 지내야지, 헤어턴 도련님." 내가 끼어들었다. "그러면 도련님한테 아주 좋을 거야. 아가씨를 말동무로 두면 도련님은 딴사람이 될 거야."
"말동무라고!" 헤어턴이 소리쳤다. "나를 미워하고, 제 신발 닦을 자격도 없는 놈으로 아는데! 싫어, 그걸로 왕이 된다 해도, 저 사람 마음에 들려고 애쓰다가 다시는 업신여김을 받지 않을 거야."
"너를 미워하는 건 내가 아니야, 나를 미워하는 건 너야!" 캐시가 더는 괴로움을 감추지 못하고 울며 말했다. "너는 히스클리프 씨만큼, 아니 그보다 더 나를 미워해."
"이 빌어먹을 거짓말쟁이." 언쇼가 말을 꺼냈다. "그럼 내가 왜 백 번도 넘게 네 편을 들어서 그 사람을 화나게 했겠어? 그것도 네가 나를 비웃고 경멸할 때 말이야, 그리고…… 계속 나를 괴롭혀 봐, 저기 들어가서 네가 들볶아서 부엌에서 쫓겨났다고 말할 테니!"
"네가 내 편을 들어 준 줄은 몰랐어." 아가씨가 눈물을 닦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나는 비참해서 모두한테 독이 올라 있었어. 하지만 이제 고마워. 그리고 용서해 달라고 빌게. 그것 말고 내가 뭘 더 할 수 있겠어?"
아가씨는 난롯가로 돌아와서 솔직하게 손을 내밀었다. 헤어턴은 먹구름처럼 얼굴이 시커메지고 험상궂어져서 주먹을 단단히 움켜쥔 채 땅바닥만 노려보았다. 캐시는 본능으로, 이 고집스러운 행동을 부추기는 것이 싫은 마음이 아니라 꺾이지 않는 옹고집이라는 것을 알아챈 게 틀림없었는데, 잠깐 망설이며 서 있더니 몸을 숙여 헤어턴의 뺨에 살며시 입을 맞추었기 때문이다. 그 꼬마 장난꾸러기는 내가 보지 못한 줄 알고, 물러나서 아주 얌전하게 아까 있던 창가 자리로 돌아갔다. 내가 나무라듯 고개를 젓자 아가씨는 얼굴을 붉히며 속삭였다. "그럼! 내가 어떻게 했어야 하는데, 엘렌? 악수도 안 하려고 하고 쳐다보지도 않으려고 하니까, 내가 저 애를 좋아한다는 걸, 친구가 되고 싶다는 걸 어떻게든 보여 줘야 했잖아."
그 입맞춤이 헤어턴의 마음을 움직였는지는 모르겠지만, 헤어턴은 몇 분 동안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고 무척 조심했고, 마침내 고개를 들었을 때는 어디로 눈을 돌려야 할지 몰라 몹시 쩔쩔맸다.
캐시는 근사한 책 한 권을 흰 종이로 깔끔하게 싸서 리본 한 가닥으로 묶고 겉에 '헤어턴 언쇼 씨께'라고 쓰더니, 나더러 사절이 되어 그 선물을 받을 사람에게 전해 달라고 했다.
"그리고 받겠다고 하면 내가 가서 제대로 읽는 법을 가르쳐 주겠다고 전해 줘." 아가씨가 말했다. "그리고 거절하면 나는 위층으로 올라가서 다시는 저 애를 놀리지 않을 거라고."
나는 그 책을 가져가서 그 말을 전했고, 내 주인 아가씨는 애타게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헤어턴은 손가락을 펴려 하지 않아서 나는 그 책을 무릎 위에 놓았다. 헤어턴은 그것을 쳐내지도 않았다. 나는 하던 일로 돌아갔다. 캐시는 탁자에 머리와 두 팔을 얹고 엎드려 있다가 책을 싼 종이가 벗겨지는 가벼운 바스락 소리를 듣자, 살그머니 다가가서 사촌 곁에 조용히 앉았다. 헤어턴은 몸을 떨었고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 무례함도 그 뚱한 거친 성미도 다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고, 처음에는 아가씨의 묻는 눈길과 속삭이는 부탁에 한마디도 대답할 용기를 내지 못했다.
"용서한다고 말해 줘, 헤어턴, 응. 그 짧은 한마디만 해 주면 나는 정말 행복할 거야."
헤어턴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웅얼거렸다.
"그리고 내 친구가 되어 줄 거지?" 캐시가 묻듯이 덧붙였다.
"아니, 너는 평생 날마다 나를 부끄러워할 거야." 헤어턴이 대답했다. "나를 알면 알수록 더 부끄러워할 텐데, 나는 그걸 못 견뎌."
"그래서 내 친구가 안 되어 주겠다고?" 아가씨가 꿀처럼 달콤하게 웃으며 바싹 다가앉았다.
그 뒤로는 알아들을 만한 이야기가 더 들리지 않았지만, 다시 돌아보니 받아들인 책의 책장 위로 숙인 두 얼굴이 어찌나 환하게 빛나던지, 나는 양쪽이 조약에 도장을 찍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고, 원수들은 그때부터 굳게 맹세한 동맹이 되었다.
두 사람이 들여다보는 책에는 값비싼 그림이 가득했는데, 그 그림들과 두 사람이 나란히 앉은 그 자리가 어찌나 좋았던지 두 사람은 조지프가 집에 올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가엾게도 조지프는 캐시가 헤어턴 언쇼와 한 의자에 앉아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 있는 광경에 기가 막혀 버렸고, 자기가 아끼는 녀석이 아가씨가 그렇게 가까이 있는 것을 참고 있다는 데 어리둥절했다. 그 일이 너무 깊이 충격을 주어서 조지프는 그날 밤 그 일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그 마음은 그가 큰 성경책을 엄숙하게 탁자 위에 펴고 그날 장사해서 번 더러운 지폐를 지갑에서 꺼내 그 위에 늘어놓으면서 내쉬는 어마어마한 한숨으로만 드러났다. 마침내 조지프는 헤어턴을 자리에서 불러냈다.
"이걸 쥔 나리한테 갖다드려라, 이 녀석아." 조지프가 말했다. "그리고 거기 있어. 나는 내 방으로 올라가겄다. 이 구덩이는 우리한테 번듯하지도 점잖지도 않으니, 우린 자리를 떠서 딴 데를 찾아야겄구먼."
"자, 캐시 아가씨." 내가 말했다. "우리도 '자리를 떠야'겠어요. 다림질은 다 끝냈어요. 갈 준비 됐어요?"
"아직 여덟 시도 안 됐잖아!" 아가씨가 마지못해 일어나며 대답했다. "헤어턴, 이 책은 벽난로 선반 위에 두고 갈게. 내일 더 가져올게."
"네가 두고 가는 책은 뭣이든 내가 큰방에 갖다 놓겄다." 조지프가 말했다. "그러면 그 책을 다시 찾기는 어려울 거여. 그러니 네 맘대로 해 봐라!"
캐시는 그러면 조지프의 책이 자기 책 대신 값을 치르게 될 거라고 으름장을 놓고는, 헤어턴 곁을 지나며 방긋 웃고 노래를 부르며 위층으로 올라갔는데, 감히 말하건대 린턴을 처음 찾아가던 무렵을 빼면 그 지붕 아래에서 어느 때보다 마음이 가벼웠을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두 사람의 친밀함은 이따금 끊기기도 했지만 빠르게 자라났다. 언쇼는 바란다고 해서 한순간에 교양 있는 사람이 될 수는 없었고, 우리 아가씨도 철학자도 아니고 참을성의 본보기도 아니었지만, 두 사람의 마음은 같은 곳을 향하고 있었으므로, 한 사람은 사랑하면서 존경하고 싶어 했고 다른 사람은 사랑하면서 존경받고 싶어 했으므로, 두 사람은 마침내 거기 닿아 내고 말았다.
보시다시피, 록우드 나리, 히스클리프 부인의 마음을 얻기는 꽤 쉬운 일이었어요. 하지만 이제는 나리가 그러려고 하지 않으셔서 다행이에요. 내가 바라는 일 가운데 으뜸은 저 두 사람이 맺어지는 거예요. 두 사람이 혼례를 올리는 날이면 나는 아무도 부럽지 않을 거예요. 잉글랜드에서 나보다 더 행복한 여자는 없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