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장
이런 일들을 혼자 곰곰이 생각하다가 나는 이따금 덜컥 겁이 나서 벌떡 일어나 모자를 쓰고, 그 농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가 보려고 나서곤 했다. 사람들이 그 사람의 행실을 두고 무어라 쑥덕거리는지 일러 주는 게 내 도리라고 양심을 달래 보기도 했지만, 그다음에는 그 사람의 굳어 버린 나쁜 버릇이 떠올랐고,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될 가망이 없다는 생각에, 그리고 내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 줄지 그것을 내가 견딜 수 있을지 의심스러워서, 그 음산한 집에 다시 발을 들여놓기를 꺼리고 말았다.
한번은 기머턴에 가는 길에 일부러 길을 돌아 옛 대문 앞을 지나갔다. 내 이야기가 이른 바로 그 무렵이었다. 맑고 서리가 내린 오후였고, 땅은 헐벗었고 길은 단단하게 말라 있었다. 나는 큰길이 왼편으로 갈라져 황야로 들어가는 자리에 서 있는 돌에 다다랐다. 거친 사암 기둥인데, 북쪽 면에는 W. H.라는 글자가, 동쪽 면에는 G.가, 남서쪽 면에는 T. G.가 새겨져 있었다. 그레인지와 하이츠와 마을로 가는 길을 알려 주는 이정표였다. 해가 그 잿빛 머리에 노랗게 비쳐 여름을 떠올리게 했는데,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별안간 어린 시절의 느낌이 한꺼번에 가슴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스무 해 전에 힌들리와 나는 그곳을 무척 좋아했다. 나는 비바람에 닳은 그 돌덩이를 한참 바라보다가 몸을 굽혔고, 밑동 가까이에 난 구멍에 달팽이 껍데기와 조약돌이 아직 가득 차 있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거기에 더 쉽게 썩어 없어질 것들과 함께 그런 것들을 즐겨 모아 두곤 했다. 그러자 현실처럼 생생하게, 어린 시절의 내 놀이 동무가 까맣고 네모진 머리를 앞으로 숙이고 작은 손에 쥔 납작한 돌 조각으로 흙을 파내며 시든 풀밭에 앉아 있는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았다. "가엾은 힌들리!" 나도 모르게 그런 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는 흠칫했다. 그 아이가 얼굴을 들어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고 내 눈이 잠깐 속아서 믿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지만, 곧바로 하이츠에 가 보고 싶은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일었다. 미신 같은 생각이 그 충동을 따르라고 나를 다그쳤다. 그 사람이 죽었으면 어쩌지! 나는 생각했다. 아니면 곧 죽을 거라면! 이게 죽음의 징조라면! 집에 가까이 갈수록 나는 더 마음이 어지러워졌고, 집이 눈에 들어오자 온 팔다리가 떨렸다. 그 환영이 나를 앞질러 가서 대문 너머로 이쪽을 내다보며 서 있었다. 엉클어진 머리에 갈색 눈을 한 사내아이가 불그레한 얼굴을 창살에 대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맨 처음 든 생각이 그랬는데, 좀 더 생각해 보니 그 애는 헤어턴, 바로 내 헤어턴이 틀림없었다. 열 달 전에 내가 떠날 때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아이고, 우리 아기!" 나는 어리석은 두려움을 순식간에 잊어버리고 외쳤다. "헤어턴, 넬리야! 너를 돌봐 주던 넬리."
아이는 팔이 닿지 않는 데까지 뒷걸음질 치더니 커다란 부싯돌을 하나 집어 들었다.
"너희 아빠를 뵈러 왔어, 헤어턴." 나는 말을 덧붙였다. 그 몸짓을 보니, 넬리라는 사람이 그 애의 기억 속에 아직 살아 있다 하더라도 그 애는 그 넬리를 눈앞의 나와 같은 사람으로는 알아보지 못하는 듯했다.
아이는 던질 것을 쳐들었고, 나는 달래는 말을 꺼냈지만 그 손을 막지는 못했다. 돌은 내 모자에 맞았고, 그러자 그 꼬마의 더듬거리는 입술에서 욕이 줄줄이 쏟아져 나왔는데, 그 뜻을 알고 하는 소리인지는 몰라도 입에 익은 듯 힘주어 내뱉는 바람에 그 애기 같은 얼굴이 섬뜩할 만큼 독살스럽게 일그러졌다. 나리도 짐작하시겠지만, 그 일은 화가 나기보다 슬펐어요. 나는 울 것 같은 마음으로 주머니에서 오렌지 하나를 꺼내 달래려고 내밀었다. 아이는 망설이다가 내 손에서 그것을 낚아챘는데, 내가 약만 올리고 실망시키려는 줄로 아는 눈치였고, 그래서 나는 하나를 더 꺼내 보이되 아이의 손이 닿지 않게 쥐고 있었다.
"누가 그런 고운 말을 가르쳐 줬니, 아가?" 내가 물었다. "부목사님이?"
"부목사도 너도 염병할! 그거 내놔." 아이가 대답했다.
"어디서 그런 걸 배웠는지 말해 주면 줄게." 내가 말했다. "누가 너를 가르치니?"
"마귀 아빠." 아이가 대답했다.
"그럼 아빠한테서 뭘 배우는데?" 나는 말을 이었다.
아이가 과일을 잡으려고 펄쩍 뛰었고, 나는 그것을 더 높이 쳐들었다. "아빠가 뭘 가르쳐 주니?" 내가 물었다.
"아무것도." 아이가 말했다. "아빠 앞길에 얼씬대지 말라는 거 말고는. 아빠는 나를 못 견뎌 해. 내가 아빠한테 욕을 하니까."
"아! 그럼 마귀가 아빠한테 욕하라고 가르쳐 주는구나?" 내가 말했다.
"응, 아니." 아이가 느릿느릿 말했다.
"그럼 누가?"
"히스클리프."
나는 그 애가 히스클리프 씨를 좋아하는지 물었다.
"응!" 아이가 다시 대답했다.
왜 좋아하는지 그 까닭을 듣고 싶었지만 내가 알아낼 수 있었던 건 이런 말들뿐이었다. "몰라. 아빠가 나한테 하는 대로 그 사람이 아빠한테 갚아 줘. 아빠가 나한테 욕하면 그 사람이 아빠한테 욕해 줘. 그 사람이 나더러 하고 싶은 대로 하래."
"그럼 부목사님이 읽고 쓰는 것도 안 가르쳐 주니?" 내가 캐물었다.
"응. 부목사가 문지방을 넘어오기만 하면 그 빌어먹을 이빨을 그 빌어먹을 목구멍에 처넣어 버린대. 히스클리프가 그러겠다고 약속했어!"
나는 오렌지를 아이 손에 쥐여 주고, 넬리 딘이라는 여자가 뜰 대문 앞에서 이야기를 하려고 기다린다고 아빠한테 전하라고 일렀고, 아이는 길을 따라 올라가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힌들리 대신 히스클리프가 문간 돌 위에 나타났고, 나는 곧바로 돌아서서 있는 힘을 다해 길을 달려 내려와 이정표에 다다를 때까지 한 번도 멈추지 않았는데, 도깨비라도 불러낸 것처럼 겁에 질려 있었다. 이 일은 이저벨라 아가씨의 일과는 별 상관이 없다. 다만 그 일로 나는 더욱 눈을 부릅뜨고 지키기로, 그리고 린턴 마님의 기분을 거슬러 집안에 풍파를 일으키는 한이 있더라도 그런 나쁜 기운이 그레인지에 퍼지지 못하게 힘껏 막기로 마음을 굳혔다.
다음번에 히스클리프가 왔을 때, 우리 아가씨는 마침 안뜰에서 비둘기에게 모이를 주고 있었다. 아가씨는 사흘 동안 올케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짜증 섞인 투정도 그만두었으므로 우리는 한결 마음이 편했다. 히스클리프가 린턴 아가씨에게 쓸데없는 친절 하나 베푸는 버릇이 없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아가씨를 보자마자 그는 먼저 조심스럽게 집 앞쪽을 휘 둘러보았다. 나는 부엌 창가에 서 있었지만 눈에 띄지 않게 물러섰다. 그러자 그는 포석을 가로질러 아가씨에게 다가가 무슨 말을 했는데, 아가씨는 당황해서 자리를 뜨고 싶어 하는 것 같았고, 그는 그러지 못하게 아가씨의 팔에 손을 얹었다. 아가씨는 고개를 돌렸고 그가 무언가 묻는 듯했지만 아가씨는 대답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는데, 그는 다시 한번 재빨리 집 쪽을 흘끗 보더니 아무도 보지 못한다고 생각했는지, 그 악당은 뻔뻔스럽게도 아가씨를 끌어안았다.
"유다! 배신자!" 나는 소리를 질렀다. "위선자이기까지 하구나, 그렇지? 일부러 속여 넘기는 사기꾼이야."
"누가, 넬리?" 바로 내 곁에서 캐서린의 목소리가 말했다. 바깥의 두 사람을 지켜보는 데 너무 정신이 팔려서 마님이 들어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마님의 하찮은 친구 말이에요!" 나는 열을 올려 대답했다. "저기 저 음흉한 악당이요. 아, 우리를 흘끗 봤어요. 이리 들어오네요! 아가씨를 미워한다고 마님한테 말해 놓고 아가씨한테 수작을 건 걸 그럴듯하게 둘러댈 배짱이 있을까요?"
린턴 부인은 이저벨라가 몸을 비틀어 빠져나가 뜰로 달아나는 것을 보았고, 1분 뒤 히스클리프가 문을 열었다. 나는 분한 마음을 얼마쯤 터뜨리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지만, 캐서린은 화를 내며 입을 다물라고 하고는, 감히 주제넘게 건방진 혀를 놀리면 부엌에서 쫓아내겠다고 을러댔다.
"네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네가 이 집 안주인인 줄 알겠어!" 마님이 외쳤다. "너는 네 분수를 좀 알아야 해! 히스클리프, 이런 소란을 피워서 대체 뭘 하려는 거야? 이저벨라는 내버려 두라고 했잖아! 부탁이야, 내버려 둬. 여기서 대접받는 게 지겨워서 린턴이 너를 막으려고 빗장을 지르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면!"
"하느님, 그자가 그런 짓을 하지 않게 해 주소서!" 그 검은 악당이 대답했다. 그 순간 나는 그가 몹시 미웠다. "하느님, 그자를 온순하고 참을성 있게 지켜 주소서! 날이 갈수록 그자를 천국으로 보내 버리고 싶어서 미치겠으니까!"
"쉿!" 캐서린이 안쪽 문을 닫으며 말했다. "나를 성가시게 하지 마. 왜 내 부탁을 무시했어? 그 애가 일부러 너한테 다가온 거야?"
"그게 너하고 무슨 상관이야?" 그가 으르렁거렸다. "그 애가 원하면 나는 입 맞출 권리가 있고, 너는 반대할 권리가 없어. 나는 네 남편이 아니야. 네가 나 때문에 질투할 필요는 없다고!"
"너 때문에 질투하는 게 아니야." 마님이 대답했다. "너를 위해서 질투하는 거야. 얼굴 펴. 나한테 인상 쓰지 마! 이저벨라가 좋으면 결혼하면 돼. 그런데 정말 좋아? 사실대로 말해, 히스클리프! 거봐, 대답을 못 하잖아. 틀림없이 안 좋아하는 거야."
"그런데 린턴 나리께서 누이가 저 사람과 결혼하는 걸 허락하실까요?" 내가 물었다.
"린턴은 허락해야 해." 마님이 딱 잘라 대꾸했다.
"그 사람은 그런 수고를 하지 않아도 돼." 히스클리프가 말했다. "그 사람 허락 없이도 나는 얼마든지 해낼 수 있어. 그리고 너 말이야, 캐서린, 말이 나온 김에 지금 몇 마디 해 두고 싶어. 네가 나를 지옥같이, 그래, 지옥같이 대했다는 걸 내가 안다는 걸 너도 알아 두면 좋겠어! 듣고 있어? 내가 그걸 모를 거라고 우쭐해한다면 너는 바보고, 달콤한 말로 내가 위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너는 천치야, 그리고 내가 앙갚음도 못 하고 당하고만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머지않아 그렇지 않다는 걸 똑똑히 보여 주겠어! 그동안은 네 시누이의 비밀을 일러 줘서 고마워. 맹세코 그걸 한껏 써먹을 거야. 그러니 너는 비켜서 있어!"
"이건 또 무슨 새로운 얼굴이야?" 린턴 부인이 깜짝 놀라 외쳤다. "내가 너를 지옥같이 대했고, 그래서 네가 앙갚음을 하겠다고!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이 배은망덕한 짐승아? 내가 언제 너를 지옥같이 대했어?"
"너한테 앙갚음하겠다는 게 아니야." 히스클리프가 아까보다 덜 사납게 대답했다. "그런 계획이 아니야. 폭군은 노예를 짓밟지만 노예들은 그 폭군에게 대들지 않고, 자기보다 밑에 있는 자들을 짓밟지. 너는 재미 삼아 나를 고문해서 죽여도 좋아. 다만 나도 똑같이 좀 재미를 보게 내버려 두고, 할 수 있는 만큼은 모욕을 삼가 줘. 내 궁전을 허물어뜨려 놓고 오두막을 세워서는, 그걸 내 집으로 내준 네 자비심에 흐뭇해하지는 마. 네가 정말로 내가 이저벨라와 결혼하기를 바란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내 목을 따 버리겠어!"
"아, 그러니까 내가 질투를 안 하는 게 잘못이라는 거구나?" 캐서린이 외쳤다. "좋아, 아내를 주겠다는 말은 다시 하지 않을게. 그건 사탄한테 길 잃은 영혼을 바치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너의 기쁨은 사탄처럼 남을 비참하게 만드는 데 있어. 네가 그걸 증명하고 있어. 에드거는 네가 왔을 때 부리던 심술을 이제 풀었고 나도 이제 막 마음이 놓이고 평온해지기 시작했는데, 너는 우리가 평화롭게 지내는 꼴을 못 견디고 싸움을 일으키기로 작정한 것 같아. 할 테면 에드거하고 싸우고 그 누이를 속여, 히스클리프. 그러면 나한테 앙갚음할 가장 효과 좋은 길을 정확히 찾아낸 셈일 테니까."
이야기는 거기서 끊겼다. 린턴 부인은 얼굴이 달아오르고 침울한 표정으로 난롯가에 앉았다. 마님이 부리던 정령이 말을 듣지 않기 시작했는데, 마님은 그것을 가라앉힐 수도 다스릴 수도 없었다. 그는 팔짱을 끼고 난롯가에 서서 못된 생각을 곱씹고 있었고, 나는 두 사람을 그렇게 내버려 둔 채 주인을 찾으러 갔는데, 주인은 무엇 때문에 캐서린이 아래층에서 그토록 오래 머무는지 궁금해하던 참이었다.
"엘렌." 내가 들어가자 주인이 말했다. "마님을 보았소?"
"네, 부엌에 계세요, 나리." 내가 대답했다. "히스클리프 씨가 하는 짓 때문에 몹시 속이 상하셨어요. 정말이지 이젠 그 사람이 찾아오는 일을 다르게 정해 둘 때가 된 것 같아요. 너무 무르게 굴어서 탈이 났고, 이제 일이 이렇게까지 되었으니……" 그러고 나서 나는 안뜰에서 본 장면과, 감히 말할 수 있는 데까지 그 뒤에 벌어진 말다툼을 죄다 이야기했는데, 마님이 나중에 손님을 감싸고 나서서 스스로 일을 그르치지만 않는다면 그 이야기가 마님에게 크게 해롭지는 않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에드거 린턴은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듣기도 힘들어했는데, 주인이 맨 처음 한 말을 듣고 나는 주인이 아내에게도 잘못이 없다고 여기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참을 수가 없군!" 주인이 외쳤다. "그런 자를 친구라고 하고 나더러 그자를 상대하라고 억지를 부리다니, 수치스러운 일이오! 현관에서 하인 둘을 불러다 주시오, 엘렌. 캐서린이 그 천한 불한당과 더는 말다툼을 하며 머물러 있게 두지 않겠소. 비위는 맞출 만큼 맞춰 주었소."
주인은 아래로 내려가 하인들에게 복도에서 기다리라고 이르고는 나를 뒤에 거느리고 부엌으로 갔다. 부엌 안의 두 사람은 다시 성난 말다툼을 시작한 참이었다. 적어도 린턴 부인은 새로 기운을 내어 꾸짖고 있었고, 히스클리프는 창가로 물러나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마님의 거센 꾸지람에 얼마쯤 기가 꺾인 것 같았다. 그가 먼저 주인을 보고는 마님에게 조용히 하라고 급히 손짓을 했고, 마님은 왜 그러는지 그 까닭을 알아차리자 하던 말을 멈추고 별안간 입을 다물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이오?" 린턴이 마님에게 말했다. "저 불한당한테서 그런 말을 듣고도 여기 남아 있다니, 당신은 체통이라는 걸 어떻게 생각하는 거요? 저자가 늘 하는 소리니까 당신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모양이군요. 저자의 비열함에 길이 들어서, 어쩌면 나도 그런 데 익숙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소!"
"문간에서 엿듣고 있었어요, 에드거?" 마님이 물었다. 그 말투에는 무심함과 남편의 노여움쯤 우습게 여기는 경멸이 함께 담겨 있어서, 일부러 남편의 속을 긁으려고 골라 낸 말투라는 것이 누가 봐도 뻔했다. 앞의 말에 눈을 들었던 히스클리프는 뒤의 말에 비웃는 웃음을 터뜨렸는데, 일부러 린턴 씨의 주의를 자기에게 끌려는 것 같았고, 그 뜻은 이루어졌다. 그러나 에드거는 그를 상대로 높이 날뛰는 격정을 보여 줄 생각이 없었다.
"나는 지금까지 당신을 참아 왔소." 주인이 조용히 말했다. "당신의 비참하고 타락한 성품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 책임이 당신에게만 있는 건 아니라고 느꼈기 때문이고, 캐서린이 당신과 계속 알고 지내기를 바라기에 나는 따랐소. 어리석게도 말이오. 당신이 있으면 그것이 도덕의 독이 되어 아무리 덕이 높은 사람이라도 물들이고 말 거요. 그러니 그 까닭에서, 그리고 더 나쁜 일이 생기지 않게 하려고, 나는 앞으로 이 집에 당신을 들이지 않겠고, 지금 당장 나가 달라고 통고하는 바요. 3분만 늦어도 당신은 억지로, 그리고 창피를 당하며 나가게 될 거요."
히스클리프는 비웃음이 가득한 눈으로 말하는 사람의 키와 몸집을 위아래로 재어 보았다.
"캐서린, 네 이 어린양이 황소처럼 으르렁대는구나!" 그가 말했다. "내 주먹에 머리통이 깨질 판인데. 맙소사! 린턴 씨, 당신이 때려눕힐 값어치도 없는 사람이라 정말 죽도록 유감이오!"
주인은 복도 쪽을 흘끗 보고 하인들을 데려오라고 나에게 손짓했다. 주인은 몸소 맞붙을 생각은 없었다. 나는 그 눈짓을 따랐지만, 무언가 눈치챈 린턴 부인이 뒤따라오더니 내가 하인들을 부르려는 순간 나를 뒤로 끌어당기고 문을 쾅 닫아 잠가 버렸다.
"정정당당하게 해!" 마님이 성난 얼굴로 놀라는 남편의 눈길에 대답했다. "저 사람한테 덤빌 용기가 없으면 사과를 하든지, 아니면 얻어맞든지 해. 그러면 있지도 않은 용기를 있는 척하는 버릇이 고쳐질 테니까. 아니, 당신이 열쇠를 손에 넣기 전에 내가 삼켜 버릴 거야! 내가 둘 다한테 잘해 준 보답을 아주 근사하게 받는구나! 한 사람의 나약한 성미와 다른 사람의 못된 성미를 줄곧 받아 주었더니, 그 고마움의 대가로 우습기 짝이 없을 만큼 어리석은 배은망덕 두 가지를 받다니! 에드거, 나는 당신과 당신 집안 편을 들고 있었어. 그런데 감히 나를 나쁘게 생각하다니, 히스클리프가 당신을 실컷 두들겨 패서 몸져눕게 해 주면 좋겠어!"
주인에게 그런 꼴을 만드는 데 굳이 매질까지 필요하지는 않았다. 주인은 캐서린의 손에서 열쇠를 빼앗으려 했고, 마님은 빼앗기지 않으려고 그것을 불이 가장 뜨거운 데로 던져 버렸고, 그러자 에드거 나리는 신경이 곤두서서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고 얼굴이 죽은 사람처럼 하얘졌다. 주인은 아무리 해도 그 북받치는 감정을 누를 수 없었다. 괴로움과 굴욕이 뒤섞여 주인을 완전히 짓눌렀다. 주인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얼굴을 가렸다.
"아, 세상에! 옛날 같으면 이걸로 기사 작위를 받았겠네!" 린턴 부인이 외쳤다. "우리가 졌어! 우리가 졌어! 히스클리프가 당신한테 손가락 하나 까딱하느니 차라리 임금님이 생쥐 마을을 치러 군대를 끌고 가겠지. 기운 내! 다치지는 않을 거야! 당신은 어린양이 아니라 젖먹이 산토끼 새끼야."
"그 피에 젖이 흐르는 겁쟁이와 잘 살아 보라고, 캐서린!" 마님의 친구가 말했다. "네 안목을 칭찬해 주지. 침이나 질질 흘리며 벌벌 떠는 저런 걸 나보다 더 좋다고 골랐구나! 저놈은 주먹으로 칠 것도 없고, 발로 걷어차 주면 꽤나 속이 시원하겠어. 저놈 우는 거야, 아니면 무서워서 까무러치려는 거야?"
그자는 다가가서 린턴이 기대고 있는 의자를 밀쳤다. 그는 거리를 두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주인이 재빨리 벌떡 일어나 그의 목을 정통으로 내리쳤는데, 몸집이 그보다 좀 더 작은 사람이었다면 그 한 방에 바닥에 나가떨어졌을 것이다. 그 한 방에 그는 1분 동안 숨을 쉬지 못했고, 그가 숨이 막혀 컥컥대는 사이에 린턴 씨는 뒷문으로 마당에 나가서 거기서 다시 현관으로 돌아갔다.
"거봐! 이제 여기 오는 건 끝장이야." 캐서린이 외쳤다. "이제 어서 가. 저 사람이 권총 두 자루하고 일꾼 여섯 명을 데리고 돌아올 거야. 저 사람이 우리 얘기를 엿들었다면 너를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거야. 너는 나한테 몹쓸 짓을 했어, 히스클리프! 하지만 어서 가, 서둘러! 나는 네가 궁지에 몰리는 것보다 에드거가 궁지에 몰리는 걸 보는 게 나아."
"주먹 맞은 이 자리가 목구멍에서 이렇게 화끈거리는데 내가 그냥 갈 것 같아?" 그가 벼락같이 소리쳤다. "지옥에 맹세코, 안 가! 이 문지방을 넘기 전에 저놈 갈비뼈를 썩은 개암처럼 으스러뜨려 놓겠어! 지금 저놈을 때려눕히지 않으면 언젠가는 죽여 버리고 말 거야. 그러니 저놈 목숨이 아깝거든 저놈한테 가게 해 줘!"
"나리는 안 오세요." 나는 조금 거짓말을 지어내 끼어들었다. "마부하고 정원사 둘이 와 있어요. 설마 그 사람들한테 떠밀려 길바닥으로 쫓겨날 때까지 기다리지는 않으시겠지요! 저마다 몽둥이를 들었고, 나리는 아마 그 사람들이 분부를 제대로 따르는지 거실 창에서 지켜보고 계실 거예요."
정원사들과 마부는 정말로 와 있었다. 그런데 린턴도 그들과 함께 있었고, 그들은 벌써 안뜰에 들어와 있었다. 히스클리프는 다시 생각해 보고 하인 셋과 맞붙어 싸우는 일은 피하기로 마음을 정하고는, 부지깽이를 움켜쥐고 안쪽 문의 자물쇠를 부순 뒤 그들이 쿵쿵대며 들어오는 사이에 달아났다.
몹시 흥분한 린턴 부인은 나더러 위층으로 같이 가자고 했는데, 마님은 이 소동에 내가 한몫 거들었다는 것을 몰랐고 나는 마님이 끝까지 모르기를 바랐다.
"넬리, 정신이 하나도 없어!" 마님이 소파에 몸을 내던지며 외쳤다. "대장장이 망치 천 개가 머릿속에서 두드려 대는 것 같아! 이저벨라한테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해. 이 난리는 다 그 애 때문이야. 지금 그 애든 누구든 내 화를 더 돋우면 나는 미쳐 버리고 말 거야. 그리고 넬리, 오늘 밤 에드거를 다시 보거든 내가 크게 앓아누울지도 모른다고 말해 줘. 정말 그렇게 됐으면 좋겠어. 그 사람이 나를 끔찍이도 놀라게 하고 괴롭혔어! 나도 그 사람을 놀라게 해 주고 싶어. 게다가 그 사람이 와서 욕설이나 투정을 줄줄이 늘어놓기 시작할지도 몰라. 그러면 나도 틀림없이 맞받아칠 테고, 그러면 우리가 어디까지 가게 될지 하느님만 아시겠지! 그렇게 해 줄 거지, 착한 넬리? 이 일에서 내가 조금도 잘못이 없다는 건 너도 알잖아. 무엇에 씌었기에 그 사람이 엿듣는 사람이 됐을까? 네가 나간 뒤에 히스클리프가 터무니없는 말을 하긴 했지만, 나는 곧 그 애 마음을 이저벨라한테서 돌려놓을 수 있었을 테고, 나머지 말은 아무 뜻도 없었어. 그런데 이제 다 엉망이 돼 버렸어. 어떤 사람들한테 악마처럼 붙어 다니는, 제 흉을 듣고 싶어 하는 바보 같은 욕심 때문에! 에드거가 우리 얘기를 엿듣지만 않았다면 그 사람한테 나빠질 일은 하나도 없었을 거야. 정말이지, 내가 그 사람 편을 들어 목이 쉬도록 히스클리프를 꾸짖고 났는데 그 사람이 그런 터무니없이 언짢은 말투로 나한테 대들었을 때, 나는 두 사람이 서로 무슨 짓을 하든 거의 상관하지 않았어, 더구나 이 장면이 어떻게 끝나든 우리는 모두 언제까지일지 아무도 모를 만큼 오랫동안 뿔뿔이 갈라지게 되리라는 걸 느꼈으니까! 좋아, 히스클리프를 친구로 둘 수 없다면, 에드거가 치사하게 질투를 한다면, 나는 내 가슴을 찢어서 그 두 사람의 가슴을 찢어 놓겠어, 막다른 데까지 몰렸을 때 모든 걸 단번에 끝내는 길이 될 테니까! 하지만 그건 마지막 희망이 사라졌을 때를 위해 남겨 둬야 할 일이니까, 린턴한테 느닷없이 그런 짓을 하지는 않겠어. 지금까지 그 사람은 나를 화나게 할까 봐 조심할 줄은 알았어. 그러니 너는 그 사람한테 그 조심을 그만두면 얼마나 위험한지 말해 주고, 내 성미가 얼마나 불같아서 한번 불이 붙으면 미친 사람처럼 되는지 일깨워 줘. 그 얼굴에서 그 무심한 표정 좀 걷어 내고 나를 좀 더 걱정하는 얼굴을 해 주면 좋겠어."
내가 그 분부를 무덤덤하게 받아들였으니 틀림없이 마님은 꽤 약이 올랐을 것이다. 마님은 아주 진심으로 그런 분부를 내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미리부터 제 성질이 터지는 것을 써먹을 궁리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성질에 휩쓸려 있을 때라도 마음만 먹으면 어지간히 자신을 다스릴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마님 말마따나 남편을 '놀라게 해서' 마님의 이기심을 채우려고 남편의 괴로움을 더 늘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거실로 오는 주인과 마주쳤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두 사람이 다시 말다툼을 시작할지 엿들으려고 주제넘게 발길을 돌려 되돌아갔다.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주인이었다.
"그대로 있어요, 캐서린." 주인이 말했다. 그 목소리에는 노여움은 조금도 없었고 서글픈 낙담만 가득했다. "나는 오래 있지 않을 거요. 다투러 온 것도 아니고 화해하러 온 것도 아니오. 다만 오늘 저녁 그 일이 있고 나서도 당신이 그자와 계속 가까이 지낼 생각인지 알고 싶을 뿐이오……"
"아, 제발." 마님이 발을 구르며 말을 끊었다. "제발, 지금은 그 얘기 그만해! 당신의 그 찬 피는 끓어오르게 할 수가 없어. 당신 핏줄에는 얼음물이 가득 찼어. 그런데 내 핏줄은 펄펄 끓고 있어서, 그렇게 싸늘한 꼴을 보면 피가 미친 듯이 춤을 춘다고."
"나를 쫓아 버리고 싶으면 내 물음에 대답해요." 린턴 씨가 끈질기게 말했다. "당신은 꼭 대답해야 해요. 그렇게 사납게 굴어도 나는 겁나지 않아요. 당신도 마음만 먹으면 누구 못지않게 태연할 수 있다는 걸 나는 알았으니까. 앞으로 히스클리프를 버리겠소, 아니면 나를 버리겠소? 당신이 내 친구이면서 동시에 그자의 친구일 수는 없소. 그리고 나는 당신이 어느 쪽을 고르는지 꼭 알아야겠소."
"나는 혼자 있어야겠어!" 캐서린이 미친 듯이 외쳤다. "그렇게 해 달라고! 내가 서 있지도 못하는 게 안 보여? 에드거, 당신, 당신은 나가!"
마님은 종을 흔들어 대다가 끝내 쨍 소리와 함께 종이 부서졌고, 나는 느긋하게 들어갔다. 그토록 터무니없고 못된 발작이라니, 성인이라도 성미를 잃을 만했다! 마님은 소파 팔걸이에 머리를 찧으며 이를 갈고 있었는데, 그 이가 산산조각으로 부서지지나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린턴 씨는 별안간 뉘우침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마님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주인은 나더러 물을 가져오라고 했다. 마님은 말할 숨도 없었다. 나는 물을 한 잔 가득 떠 왔는데, 마님이 아무리 해도 마시려 하지 않으므로 할 수 없이 그 물을 마님 얼굴에 확 뿌렸다. 몇 초 뒤 마님은 몸을 뻣뻣하게 쭉 뻗더니 눈을 허옇게 뒤집었고, 핏기가 가셨다가 시퍼렇게 질린 뺨이 죽은 사람의 얼굴처럼 보였고, 린턴은 겁에 질린 얼굴이었다.
"아무 일도 아니에요." 나는 속삭였다. 마음속으로는 나도 겁이 나는 것을 어쩔 수 없었지만, 주인이 굽히지 않기를 바랐다.
"입술에 피가 묻었소!" 주인이 몸서리치며 말했다.
"상관 마세요!" 나는 매몰차게 대답했다. 그러고는 주인이 오기 전에 마님이 미친 듯한 발작을 부려 보이겠다고 마음먹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나는 조심성 없이 큰 소리로 그 이야기를 했고, 마님이 벌떡 일어난 것을 보면 마님도 그 말을 다 들은 게 틀림없었다. 머리칼은 어깨 위로 흩날리고 눈은 번득였으며, 목과 팔의 힘줄이 사람 같지 않게 불거져 있었다. 나는 적어도 뼈 몇 대는 부러질 거라고 각오했지만, 마님은 잠깐 주위를 노려보기만 하더니 방에서 뛰쳐나갔다. 주인이 따라가 보라고 해서 나는 마님의 침실 문 앞까지 따라갔지만, 마님이 안에서 문을 걸어 잠가 버리는 바람에 나는 그 이상 더 들어갈 수가 없었다.
이튿날 아침 마님이 아침을 먹으러 내려올 기색이 없기에 나는 위로 가져다 드릴지 여쭈러 갔다. "싫어!" 마님이 딱 잘라 대답했다. 점심때도 차 마실 때도 같은 물음을 되풀이했고, 그다음 날에도 다시 물었지만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린턴 씨는 린턴 씨대로 서재에서 시간을 보내며 아내가 무엇을 하고 지내는지 묻지 않았다. 주인은 이저벨라와 한 시간 동안 따로 이야기를 나누며, 히스클리프가 다가온 데 대해 아가씨가 마땅히 느껴야 할 혐오감을 어떻게든 끌어내려고 애썼다. 그러나 아가씨의 얼버무리는 대답에서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어서 흡족하지 못한 채 캐묻기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다만 끝에 가서 주인은, 아가씨가 그 하찮은 구혼자를 부추길 만큼 정신이 나갔다면 그날로 아가씨와 자기 사이의 모든 혈연이 끊어질 거라고 엄숙하게 경고했다.